국민연금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을 제지하면서 ‘주총거수기’ 꼬리표를 확실히 뗐다.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후 첫 성공 사례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조 회장 연임에 계속 반대표를 던졌지만 한 번도 가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공식화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나서면 다른 기관투자가에 영향을 줄 것이란 관측이 많았는데 실제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를 앞두고 해외 연기금 3곳이 조 회장 연임에 반대 뜻을 표했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가동할 때부터 사실상 조 회장을 목표로 했다. 올 초 내놓은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에서 수탁자 책임 활동의 대상을 ‘지분율이 5% 이상인 투자 기업 중 검경의 수사 착수 등 국가기관의 조사가 들어간 기업’으로 구체화했다.
그렇다고 조 회장 연임 제지가 순탄하게 진행된 건 아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자문기구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 한진칼·대한항공 주총에 대한 검토를 맡겼는데 수탁자책임위는 지난 1월 23일 첫 회의에서 양사에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 반대’를 권고했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인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를 주문하면서 6일 후인 29일 2차 회의를 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국민연금은 이날 회의에 대한항공 관련 단기매매차익을 종전 108억원에서 72억원으로 줄여 재보고했다.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관투자가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려면 단시간에 얻은 차익을 뱉어내야 하는데 반대 의사를 내놓은 전문위원이 이 부분을 지적해서다.
그럼에도 단기매매차익이 문제되자 국민연금은 한진칼과 대한항공을 분리했다. 지난 2월 1일 기금운용위는 한진칼에 정관 변경을 요구하는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를, 대한항공에는 경영참여에 해당하지 않는 주주권 행사를 결정했다. 조 회장 연임 반대는 경영참여 주주권에 해당하지 않는다.
‘종이호랑이’ 논란도 있었다. 배당을 늘리라는 요구를 남양유업이 공개적으로 거부했고 분식회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주총에선 국민연금이 반대한 사내이사 재선임 건이 가결됐다. 국민연금은 국민적 공분이 큰 한진가(家)에서 성과를 내야 했다.
수탁자책임위는 대한항공 주총을 이틀 앞둔 지난 25일 조 회장 연임의 건을 논의했으나 결론 내지 못했다. 주주권행사분과 위원 8명 중 4명이 찬성, 4명이 반대로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다음 날 다시 모인 수탁자책임위는 주주권행사분과로 해결이 안 되자 책임투자분과 위원까지 소집했다. 모두 10명이 전체회의를 열었고 책임투자분과 위원 2명이 연임 반대에 손들었다.
국민연금은 29일 예정된 한진칼 주총에 ‘이사가 회사 또는 자회사와 관련해 배임, 횡령죄로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가 확정된 때에는 결원으로 본다’는 내용의 정관 변경을 제안하며 또다시 조 회장을 겨냥했다. 다만 국민연금이 보유한 한진칼 주식은 7.34%로 대한항공 주식 보유 비율 11.56%보다 작다. 이날 수탁자책임위는 한진칼 석태수 대표이사의 사내이사 선임에는 찬성키로 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