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북·미 정상회담 닷새 전 발생한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사건은 북한 망명정부 설립을 기도하는 반북단체와 미국 수사기관이 얽힌 첩보전이었다. 스페인 당국이 작성한 수사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사건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의문점은 여전히 많다.
호세 데 라 마타 스페인 고등법원 판사는 26일(현지시간) 북한대사관 습격사건 수사 보고서를 기밀 해제하고 내용을 공개했다고 AP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습격은 멕시코 국적의 북한 인권운동가 에이드리언 홍 창 주도로 총 10명이 저질렀다. 홍 창은 사건 당일인 지난달 22일 오후 마드리드 소재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서윤석 3등서기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매튜 차오’이고 ‘배런 스톤 캐피털’이라는 업체의 ‘경영 파트너(managing partner)’라고 소개하며 가짜 신분증을 내밀었다.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노려 나머지 9명은 대사관 건물에 난입해 도검과 쇠파이프, 모형 총기로 직원들을 위협하고 포박했다. 무기는 범행일 전 마드리드에서 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 서기관은 신체 여러 부위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 서기관은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를 지냈던 김혁철 국무위 대미특별대표가 2017년 추방된 이후 대사 대리를 맡아온 인물이다. 일당은 서 서기관에게 “우리는 북한 해방을 목표로 하는 인권운동단체 회원”이라고 주장하며 탈북을 강요했다. 하지만 서 서기관이 응하지 않자 머리에 검은 봉지를 씌우고 포박한 채 지하실에 방치했다. 이들은 컴퓨터와 휴대전화, 하드디스크, 문건 등을 챙기고 5시간 만에 대사관을 빠져나갔다. 도주에는 북한대사관 소속 차량 3대가 사용됐다.
홍 창 일당은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북한대사관에서 훔친 정보를 미 연방수사국(FBI)에 제공했다. 홍 창이 FBI와 접촉한 시점은 2차 북·미 정상회담 첫날인 지난달 27일이었다. 홍 창이 제공한 정보가 무엇인지, FBI가 이를 받아들였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북한전문 매체 NK뉴스에 따르면 홍 창은 비정부기구 ‘북한 자유’(LiNK)의 공동설립자이며 2015년부터 뉴욕에서 북한 정권 붕괴를 대비하는 ‘조선연구원(Joseon Institute)’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2006년 중국에서 탈북자 6명의 탈출을 돕다 공안에 체포되기도 했다. 공범 9명 중에는 ‘이우란(Woo Ran Lee)’이라는 이름의 남한 국적자와 미국 시민권자 ‘샘 류(Sam Ryu)’가 포함돼 있다. 신원이 알려진 세 사람은 이름을 미뤄 국적만 다를 뿐 모두 한국계로 추정된다. 탈북민일 가능성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을 보호 중인 반북단체 ‘자유조선’(옛 천리마민방위)은 이날 성명을 통해 당시 사건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자유조선은 “우리의 행동은 공격이 아니었다”며 “우리는 초대를 받고 대사관에 들어갔으며 누구에게도 재갈을 물리거나 때리지 않았고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자유조선은 또 “우리 조직은 상호 동의한 비밀계약에 따라 상당한 잠재적 가치를 지닌 일부 정보를 FBI와 공유했다”며 “정보 공유는 FBI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미국 언론이 최근 ‘미국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자신들을 주범으로 지목한 데 대해서는 “중대한 신뢰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FBI는 “수사 관련 정보는 관행에 따라 부인도 확인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만 내놨다. 로버트 팔라디노 미 국무부 부대변인도 “미국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수사 보고서 공개에도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해외공작을 맡는 중앙정보국(CIA)이 아니라 수사기관인 FBI가 개입한 것부터 이례적이다. 이번 습격사건이 돈세탁과 사이버 해킹 등 FBI의 대북 수사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자유조선과 FBI 간 미묘한 기류로 미뤄 김정남이 암살된 이후 김한솔이 FBI의 보호를 받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된다. 자유조선이 대사관 ‘초대’에 응한 것일 뿐 습격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도 미심쩍은 대목이다. 이를 두고 북한대사관 내 공모자의 존재를 암시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