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시작한 프로야구에서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크게 이긴 상황에서 9회말 마무리 투수가 등판했고, 상대는 이에 반발해 투수를 대타로 내세웠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야구의 격언을 무시한 황당한 사태에 팬들의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이중잣대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26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 9회말. 한화가 13-7로 크게 앞선 2사 1루에서 한화 한용덕 감독은 마무리 정우람을 마운드에 올렸다. 그러자 황당해하는 KIA 김기태 감독의 모습이 중계화면에 잡혔다. 김 감독은 타석에 대기 중이던 황대인을 불러들이고, 타자가 아닌 투수 문경찬을 내세웠다. 장갑과 팔꿈치보호대까지 착용하지 않았을 정도로 헐레벌떡 타석에 들어선 문경찬은 그대로 서서 스탠딩 삼진을 당했다.
팬들은 먼저 김 감독의 처사에 날을 세웠다. 6점이라는 큰 점수차가 났지만 그래도 프로가 팬들 앞에서 일찌감치 경기를 포기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김 감독이 이와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팬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김 감독은 LG 트윈스 사령탑 시절이었던 2012년 9월 12일 잠실 SK 와이번스전에서도 0-3으로 뒤진 9회 SK 이만수 감독이 두 차례 투수 교체를 하자 마지막 타자를 신인 투수 신동훈으로 교체해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다만 한 감독도 이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야구계의 불문율을 어겼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AP통신 등 주요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는 메이저리그의 불문율에 대해 ‘신사적 페어플레이를 방해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모든 행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복은 용인된다는 게 메이저리그의 인식이다.
이 불문율에 따르면 한 감독은 ‘상대를 자극하지 말라’는 불문율의 대명제를 어긴 것이고, 오히려 김 감독 입장에선 이에 대한 보복을 한 셈이다. 한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정우람은 개막 후 실전등판 기회가 없어 점검차 기용했다”고 해명했다. 김 감독은 아직까지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상태다.
고무줄 잣대를 적용하는 KBO도 문제다. 7년 전 KBO는 상벌위원회를 열고 김 감독에게 벌금 500만원과 엄중경고의 제재를 부과했다. KBO는 “승리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소홀히 하여 야구장을 찾은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스포츠정신을 훼손시켰다”고 징계 이유를 설명했다. 또 “향후 이와 같이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일이 재발할 경우 더욱 강력히 제재할 방침”이라고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징계도 없다고 밝혔다. KBO 관계자는 “김 감독이 항의의 뜻으로 투수를 타자로 내세웠다고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선수기용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면 현장의 권한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