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접하는 하나님 언어

입력 2019-03-28 00:05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이 잠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모든 지식의 근본일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유진 피터슨은 오늘날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대부분의 문화에서 가장 선호되는 ‘텍스트’와 최고 ‘권위자’는 ‘자기 자신’이 됐다고 말한다. 권위 있는 텍스트의 상실과 함께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정서적 황폐함을 지적한 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모든 일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며 산다. 세상은 우연과 필연이 함께 만들어내는 역동적 드라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판단하고 살지만, 우연히 다가오는 삶의 복잡함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며 당혹스러워한다. 따라서 인간이 깨달은 최고의 지혜는 바로 ‘내가 모른다’는 겸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겸손이란 자기 비하나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중심의 변화다. 인간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중심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발언들은 늘 후대에 수정됐다. 그것은 당대에 ‘적합한 것’일지언정 언제나 ‘참된 것’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한다. 언어는 두 인격자 사이에 소통의 도구이며 내용이다. 우리를 향해 들려오는 모든 언어와 교감을 이룰 때 우리의 사유는 치밀해지고 감성은 풍부해진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언어들과 만난다. 그 언어를 통해 인간은 정체성과 자존감, 자아를 형성해 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언어를 돌아본다면 그야말로 ‘독한 혀’들의 막말과 독설이 넘쳐난다. 다들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고운 말로는 해결이 안 되는지 언젠가부터 부정적 언어가 습관이 돼버린 것 같아 참 슬프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명은 인간의 영혼 속에 자리 잡은 부정적 언어의 독소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언어를 일상 언어로 치환해 소통하는 능력이 요청된다. 교회에서 쉽게 접하는 언어는 사실 교회 밖에서는 매우 낯설고 어색하다. 여기에 우리의 시대적 소명이 있다. 교리적 상투성을 넘어 인문적 상상력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보자. 성경을 우리 삶으로 끌어와서 일상적 언어로 다시 이야기하는 문학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며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언어를 전해 주신다. 성경은 하늘의 언어다. 하지만 그 하늘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때 더 큰 이해와 공감을 불러올 수 있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히 일러주신다. 그분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씨 뿌리는 농부와 고기 잡는 어부의 일상을 통해, 집 나간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통해 나타난다. 세상 만물이 그분의 언어로 표현될 때, 들의 꽃은 그저 매일 스쳐 지나가는 꽃이 아니고 공중의 새는 그냥 새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과 교감을 나누기 위해 성경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통해 말을 걸어오신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계기를 통해 하나님의 언어를 접한 뒤 새로운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변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의 언어를 만날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내가 처한 현실과 고통의 의미를 정직하게 질문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의 가치 혁명을 이룰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윤영훈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