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까지 언급하며 檢 주장 반박한 법원… ‘윗선’ 수사 제동

입력 2019-03-27 04:02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수사를 받고 있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26일 새벽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 9시간가량 대기했던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청와대를 향하던 검찰 수사에 급제동이 걸렸다. 특히 법원이 기각 사유에 ‘정당한 인사·감찰권 및 협의 관행’을 주장했던 청와대 입장을 일정 부분 반영하면서 검찰의 수사 프레임 자체가 흔들리게 됐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서울 동부지법 박정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6일 새벽 김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박 부장판사는 “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과 당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 및 감찰권이 적절하게 행사되지 못해 방만한 운영과 기강 해이가 문제 된 사정이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공공기관 운영 정상화를 위한 인사수요 파악을 위해 사직 의사를 파악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해당 임원 복무감사 결과 비위 사실이 드러나기도 한 사정이 있었다” 등의 설명도 내놨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환경부가 전 정권 임원들의 사퇴를 종용했고, 거부한 인사들을 표적 감사했다는 게 핵심이다. 법원은 이 같은 행위들이 문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낙하산 인사’를 위한 찍어내기용 감찰이었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정당한 감찰권’으로 반박했던 김 전 장관 측 입장 역시 상당 부분 반영된 셈이다.

박 부장판사는 또 환경부가 청와대와 임원 구성을 두고 논의한 행위에 대해서도 관련 법령 제정 때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라고 봤다. 향후 청와대 인사들이 환경부 산하 임원 교체에 구체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더라도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검찰은 김 전 장관 영장 기각에도 청와대 인사라인에 대한 수사는 계속한다는 입장이지만 법원은 검찰이 구성한 법리 자체에 허점이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법조계에서도 김 전 장관 영장 기각 사유를 두고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통상 영장실질심사 결과에는 범죄 소명의 정도와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 등이 간략히 담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판사의 주관적인 법적 판단까지 담겼다”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인 만큼 원칙대로 입장을 밝혔으면 논란이 가중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최순실을 언급한 건 변호인 주장을 압축적으로 기각 사유에 담으면서 나타난 부작용 같다”고 했다.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수사의 보안성을 위해서라도 이처럼 상세히 기각 사유를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검찰 입장에서 보면 진행 중인 수사에 대해 일종의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비쳐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다”고 전했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출신 김종민 변호사는 페이스북에 “같은 사안을 놓고 지난번엔 블랙리스트라며 중형을 선고하고, 이번에는 인사협의 관행에 따른 것이라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로또 사법의 시대’”라고 비판했다.

반면 구속 사유와 본안 판단은 다르다는 의견도 있다.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는 “영장 심사는 판사 개인의 판단 영역이지 법정의 유무죄 판단은 아니다”며 “기각돼도 법정에서 실형을 받을 수 있고 구속돼도 무죄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 대법원 문건을 무단으로 반출한 혐의를 받는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구속영장이 기각될 때도 법원은 이례적으로 3600자 분량의 사유를 공개한 바 있다.

박상은 이가현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