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첫 드라마 연출, 극장에 못 걸다니 뼈아파” [인터뷰]

입력 2019-03-27 00:10
첫 TV 드라마 연출작 ‘리틀 드러머 걸’을 선보인 박찬욱 감독.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성 캐릭터 위주의 서사를 취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인류의 절반이 여성인데 그런 현실을 고려한 영화들이 적다. 그리고 나는 딸 가진 아빠다. 아이가 성장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왓챠 제공

“영화 만드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 싶었어요. 단 한 가지, 극장에서 못 튼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죠. 이렇게 뼈아픈 일일지 몰랐어요. 화질이나 음향 모든 면에서 영화와 똑같이 공들여 찍었는데, 조그마한 스마트폰 화면으로 본다고 생각하니 슬퍼지더군요.”

박찬욱(56) 감독이 털어놓은 솔직한 속내다.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을 내놓은 그를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박 감독은 “다음번에 TV나 OTT(Over The Top·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위한 작품을 또 하게 된다면, 극장 상영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여야만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박 감독이 TV 드라마를 연출한 건 처음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작전에 연루돼 스파이가 된 무명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와 그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 영국 BBC와 미국 AMC가 공동 제작해 지난해 양국에서 각각 방영됐다.

영국 첩보원 출신 작가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드라마라는 형식을 빌린 건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130분짜리 영화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 감독은 “드라마라고 해서 연출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한 장면. 왓챠 제공

“긴 영화라고 생각하고 작업했어요. 물론 영화와는 다른 재미도 있었죠. 각각의 에피소드를 매듭지으면서 다음 편을 궁금하게 만드는 작업이 흥미로웠어요.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전편 줄거리를 요약해 보여주는 것도 꼭 해보고 싶었죠. 흥분되고 재미있었어요(웃음).”

방송분은 규정에 따라 다듬을 수밖에 없었는데, 박 감독이 편집 전권을 갖고 재편집한 감독판을 국내 온라인 플랫폼 왓챠를 통해 29일 독점 공개하게 됐다. 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내용이 국내 관객들에게 다소 낯설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고 박 감독은 우려했다.

“우리와 상관없는 소재로 느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한반도에 사는 우리와 그들의 삶과 역사엔 통하는 지점이 있어요. 그 지역에선 테러와 앙갚음으로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도 전쟁으로 인한 증오가 뿌리박혀있죠. 공감할 만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섬세한 화면 연출을 보고 있노라면 박 감독의 작품임을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 다만 박 감독은 “내 작품처럼 보이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개별 스토리에 맞는 형식을 취하려고 노력할 뿐이지, 나의 인장을 찍으려고 맹목적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박 감독은 국경 없는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3년에는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상업영화를 해외 시장에 소개하면 거기선 예술영화 취급을 받는다”면서 “마이너리티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게 매력적”이라고 전했다.

박 감독에게는 매 작품이 새로운 시도이자 도전이다. 이를테면 ‘스토커’ 때는 과묵한 연출 방식을 택했다면 ‘리틀 드러머 걸’에서는 영어 대사를 늘리고 미묘한 뉘앙스까지 살렸다. “그런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게 저로선 뿌듯합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기분이 든달까요.”

차기작은 할리우드 서부극 스릴러 영화와 국내 미스터리 수사 스릴러 영화를 놓고 고민 중이다. “저는 오직 관객만을 위해 (영화를) 만듭니다. 다만 흥행보다는 제가 추구하는 재미를 따르죠. 가끔 제가 생각하는 재미와 관객이 생각하는 재미가 안 맞을 때가 있지만 말입니다(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