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의 제재 압박에 맞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철수하는 고강도 조치를 취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 재무부가 대북 독자 제재를 발표한 다음 날 ‘추가 제재는 없을 것’이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한국 정부는 북·미 모두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보고 물밑 접촉을 통해 차분하게 대응해나간다는 방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재무부는 오늘 이미 존재하는 대북 제재에 대규모 추가 제재가 더해질 것이라고 발표했다”며 “나는 이러한 추가 제재의 철회(withdrawal)를 지시했다!”고 썼다. 곧이어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좋아하며 이러한 제재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미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가리킨 것은 수일 내 예정된,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미래의 제재”라고 보도했다. 미 재무부가 지난 21일 발표한 북한 관련 불법 환적 의심 선박과 해운사에 대한 독자 제재를 트럼프 대통령이 취소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핵 협상 중단을 운운하던 북한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제재 불만을 표출하자 서둘러 추가 제재 중단 카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받아든 북한이 연락사무소 철수에서 멈출지, 추가 행동에 나설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 자체가 불분명한 데다 ‘제재 해제’를 요구해온 북한이 솔깃해할 만한 파격적인 제안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아슬아슬하게 대화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북한 역시 대화 판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반발 수위를 조절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북한이 남측 인원을 추방하거나 사무소를 폐쇄하지 않고 북쪽 인원을 철수시킨 점, 철수 통보를 공식 문서가 아닌 실무 채널인 남북 연락대표를 통해 구두로 알려온 점 등이 그렇다. 북한은 연락사무소 철수 이후에도 남측 인원의 출·입경 등 편의를 보장하고 있고, 수도·전기 공급도 기존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정부 소식통은 24일 “현재 연락사무소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라고 말했다.
반면 북한이 비핵화 협상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북한은 지난달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비핵화 협상 및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시험 유예) 중단을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중국, 러시아, 유엔 대표부 대사를 불러들였다.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임박했다는 징후도 포착되고 있다. 모두 중대발표를 준비하는 듯한 움직임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북한이 남북 소통의 상징인 연락사무소 철수를 감행한 것은 우려스러운 신호”라고 말했다.
북한의 행보는 다음 달 11일 평양에서 열리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에서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김정은 2기’ 체제를 구성할 주요 인선과 함께 정책 관련 주요 결정을 하는 자리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대남·대미 및 비핵화 관련 메시지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권지혜 강준구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