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늙었어도 마음은 젊은….”
이 봄, 화랑가에서 ‘회춘’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두 전시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이웃한 두 화랑, 아라리오갤러리와 학고재갤러리가 원로를 모셨다. 각각 디지털로, 수묵으로 혁신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는 사진작가 황규태(81)와 한국화가 김호득(61) 작가가 그 주인공들이다.
아라리오갤러리 황규태 개인전 ‘픽셀’전(4월 21일까지) 전시장에는 현란한 픽셀 이미지가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미래 사회 가상의 도로 같기도 하고, 기계 회로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사이버틱한 이미지들이다. 여든을 넘긴 1세대 사진작가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이라곤 상상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1세대 작가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온 것과 비교해서도 파격적이다.
황 작가는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언론사 사진기자를 거쳐 본격적으로 사진작가가 됐다. 데뷔 이래 언제나 실험 사진의 최전방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미 1960년대에 필름 태우기, 차용과 합성, 아날로그 몽타주, 이중 노출 등의 작업으로 문제적 작가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전시의 주제인 픽셀(pixel)은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단위이다. 카메라뿐 아니라 TV 등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면서 21세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작가는 이 픽셀 작업을 아날로그 카메라를 쓰던 1990년대부터 시작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이는 자신의 사진 속 이미지의 작은 부분을 확대하는 블로업 시리즈에서 파생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어느 날 PC에서 이미지를 자세히 보려고 확대했더니 어느 순간 이미지가 깨졌다. 마치 TV 화면조정 시간 같은 작은 네모들의 집합처럼 변했다. 거기에 매료됐다”고 했다. 작가는 그 깨진 이미지의 파편에서 러시아 절대주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를 떠올렸다. 말레비치는 말년에 이미지의 최소 단위로서 검은 사각형을 발견하고 이것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말하자면 황 작가의 픽셀화는 실패에서 건져낸 발견이다. 큐레이터 강소정씨는 “황 작가는 픽셀 속에서 이미지의 원류만 찾은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다양한 변주로 엮어내고, 심지어 내러티브마저 첨가해 유희를 하고 있다”고 평했다.
학고재갤러리 ‘김호득展’(4월 7일까지)에서는 서예와 회화가 결합한 공감각적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서울대 회화과 출신으로 35년간 지필묵을 고집해온 작가는 서예의 일필휘지를 통해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는 듯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호흡을 가다듬어 한 번에 쭉 내리그은 선 하나, 그리고 가로 그은 두 줄. 힘찬 붓질 끝에 튕겨 나간 먹물 자국. 굳이 상세한 장면 묘사를 하지 않더라도 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힘에서 폭포가, 계곡 물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의 박진감 넘치는 물줄기, 금강산 구룡폭포의 용틀임 같은 그림이지만 선 몇 개로 충분했다.
작가는 캔버스가 아닌 광목에 그렸다. 광목은 이불 홑청으로, 상주의 옷으로 쓰였던 옷감이다. 물감을 묻힐 때 한지와는 달리 튕겨내는 듯한 ‘쨍한 맛’이 있어 좋다고 했다. 대구 출신인 그는 다작의 작가다. 그래서 ‘서문시장 포목상을 먹여 살리는 작가’라는 농담도 따라다닌다. 작가는 처음엔 점으로 출발해 선으로 나아갔다. 점 몇 개로 한여름 소나기 온 뒤 계곡을 흐르는 급류를 형상화했던 작가는 이번엔 수직과 수평의 선으로 폭포 시리즈를 열었다. 내리누르고 찍듯이 뿌리고 던지듯이 그려가는 손놀림이 호기롭다.
조선 시대 화가들이 흥이 뻗치면 붓을 팽개치고 손가락에 먹물을 찍어 그리던 지두화도 선보였다.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것은 설치작품이다. 지난해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에서 선보였던 ‘벼루와 종이’를 연상시키는 설치작품 ‘문득, 공간을 그리다’가 재현됐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디어 작품 ‘틈-사이’이다. 수직의 블라인드처럼 늘어뜨린 백색 광목 위로 파도 영상이 투사됐다. 그의 작업을 두고 학고재갤러리 우찬규 대표는 “손은 늙었는데 마음은 청춘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