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박영호] 인공지능과 백설공주

입력 2019-03-22 04:02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에서 갈대는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은 위대함을 표상한다.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은 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 작은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는 반면 저 우주나 행성은 자신이 거대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가슴 벅찬 선언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특정 사고와 판단능력에 있어서 인간을 앞서기 시작하는 지금, 갈대의 자부심은 흔들리고 있다. 본디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라 했던 것은 동물과 비교한 특질이었다. 개나 소나 벌레에 비교하며 스스로의 특징을 ‘생각’이라 내세울 때 인간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인간의 특질은 기계와 비교돼야 한다. 세계 최고의 기사에게 바둑을 이기고, 환자에게 필요한 처방을 인간 의사보다 더 잘 찾아내고, 법정에서 승소할 전략을 일류 변호사보다 더 잘 수립하는 마키나 사피엔스 앞에서 호모사피엔스임을 내세우는 인간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빠질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는 인간됨의 의미를 근본부터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그 사람이 벌어들이는 연봉으로 평가해 왔다. 시장에서 교환할 수 있는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을 인간의 척도로 삼는 이상 인간이 기계 앞에서 존엄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는 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하겠지만,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문제를 심화시키며 다가올 것이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하셨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제사를 잘 섬기기 위해서다. 율법의 규정을 문자적으로 실행한 훌륭한 행동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613개 규정이 있는데, 그중에 “하지 말라”는 365개, “하라”는 248개라고 계산했다. 365개는 1년을 구성하는 날의 수, 248개는 인간을 구성하는 뼈의 개수라 하여, 이 모든 율법을 외워서 하나도 틀림없이 잘 지킨다면 훌륭한 신앙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신앙이라면 기계가 훨씬 잘할 수 있다. AI에 입력해 놓으면 각 상황에 맞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판단해 실행하는 ‘완벽한 의인’이 될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 ‘보고-피하여-지나갔다’는 프로그램된 대로의 실행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사마리아인은 ‘보고 불쌍히 여기는’ 반응을 보였다. 이 마음은 그의 여정을 계획과는 다른,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몰고 간다. 바울은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 하며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장)”고 하였다. 모든 문자는 0과 1로 디지털화할 수 있다. 그러나 영은 결코 디지털화할 수 없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인공지능 시대는 멀리서 막연히 추측할 때와는 판이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기계가 운전해주면 얼마나 편할까 싶었지만, 이제는 대량 해고를 걱정해야 한다. 예전의 SF영화들은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당면한 염려는 그 반대이다. 만약 전쟁로봇이 살상을 명령 받았다면 일고의 머뭇거림도 없이 명령을 수행할 것이다. 사냥꾼에게 백설공주를 죽이라고 명령한 마녀는 더 이상 사냥꾼이 온정에 이끌려 공주를 놓아주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전쟁, 상업계약, 채용과 해고, 빚을 받아내는 일에 있어서 명령자의 의지는 그대로 관철될 것이다. 부와 권력은 점점 더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인류 대다수는 잉여 취급을 받을 시대, 그 냉혹함의 틈바구니로 작은 기적도, 사소한 온정도 기대하기 힘든 시대가 오고 있다.

대책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직업의 활로를 고민해야 하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부의 평등한 분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노력의 출발점은 동료인간에 대한 연민과 연대이다. 디지털의 냉혹한 시대를 앞둔 우리, 성과 중심사회의 틈바구니에서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과제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더 이상 백설공주도 없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