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 살다보니 다가오는 말들이 많았죠”

입력 2019-03-23 04:01
신간 ‘다가오는 말들’을 펴낸 논픽션 작가 은유. 그는 “전작들이 나의 사적인 문제를 푸는 데 절실하게 매달린 작품이었다면, 신작에는 타인의 삶도 과거보단 많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최종학 선임기자

어떤 책을 치켜세우는 명사들의 추천사는 억지스러운 주례사 같을 때가 많다. 하지만 가끔씩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격찬의 글을 마주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김혜리의 에세이집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2014)에 실린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사가 그런 경우다.

“세상에는 객관적으로도 잘 쓴 글들이 많지만 김혜리의 글이 내게는 주관적으로도 그렇다. 그의 어휘, 수사, 리듬 등에서 나는 나를 거슬리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해내지 못한다. 그는 나의 전범 중 하나다. 나는 그냥 잘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처럼’ 잘 쓰고 싶다.”

그런데 이런 추천사를 다른 국내 작가에게도 바칠 수 있다면 누가 어울릴까. 제법 많은 독서가들은 논픽션 작가 은유(48)를 첫손에 꼽을 것이다. 그가 펴낸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같은 책들은 하나같이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이들 책 덕분에 은유는 각종 매체가 연말이면 선정하는 ‘올해의 저자’ 리스트에 자주 이름을 올렸다. 그는 “그냥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처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가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새 책 ‘다가오는 말들’(어크로스)을 내놓은 은유를 만났다. 다가오는 말들은 은유가 지난해 출판계 관계자들을 인터뷰해 펴낸 ‘출판하는 마음’을 제외하면 그가 약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책에는 2017년 2월부터 일간지나 시사주간지, 온라인매체에 기고한 글 81편이 담겨 있다. 너무 오랜만에 신작이 나왔다고 말하자 은유는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일주일에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3~4개 되니 힘들더군요. 매주 당장 써서 보내야 하는 글만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살다 보니 신작 출간이 늦어진 것이고요. 책을 엮으면서 다시 읽어보니 쑥스럽기도 하고, 과거에 제가 무슨 문제에 집중했는지 되새겨보게 되더군요.”

책에 담긴 정갈한 글들을 꿰뚫는 주제가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하긴 힘들다. 어떤 글은 여성의 신산한 삶을 그려내고, 어떤 글에선 글쓰기의 가치를 알려준다. 부조리한 현실을 서늘하게 비판한 칼럼도 적지 않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은유의 전작들이 그렇듯 작가의 경험담도 비중 있게 녹아 있다. 신작 소개는 책에 담긴 이런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겪은 일, 들은 말, 읽은 말들로 엮은 에세이 모음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나 편견이 많던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고 더 나은 생각을 만들어가는 성장의 기록이자 그러지 못했던 날들의 반성문이다. 나에게서 남으로, 한발 내디뎌 세상과 만난 기록이다.”


작가가 인상 깊게 읽은 어떤 책의 한 대목을 칼럼마다 적재적소에 인용한 것도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왜 ‘다가오는 말들’인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은유는 “어떤 말은 스쳐 지나가 버리지만 어떤 말은 다가오지 않냐”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책을 읽다가 특정 대목이 마음에 들면, 열에 시달리다가 해열제를 먹었을 때처럼 내 몸에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삶의 복잡한 문제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죠. 좋은 걸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다른 작가의 문장을 자주 인용하게 돼요.”

은유가 걸어온 길은 한국 여성 상당수의 삶과 포개지는 부분이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회사에 취업했지만 결혼→출산→육아로 이어지는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어느새 그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다. 다행히 과거 직장에서 그의 글을 눈여겨봤던 선배의 독려 덕분에 뒤늦게 글쟁이의 길에 들어섰고, 각종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로 자립할 수 있었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그의 글은 한국사회의 가장자리를 향하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만약 은유가 ‘고졸’ ‘비정규직’ ‘경단녀’가 아닌, ‘대졸’ ‘정규직’ ‘남성’이었어도 지금과 같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그는 “(한국사회에서) ‘변방’에 살다 보니 살면서 걸리는 게 많았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대졸 정규직 남성으로 살았다면 글을 안 썼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그랬다면 내게 다가오는 말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대목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예컨대 여성이 마주하는 편견과 고통을 다룬 칼럼 말미엔 이런 글이 등장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침묵하는 법을 익히고 남성은 감정을 도려내는 법을 배운다. …말하기를 익히지 못한 여성이 공감을 배우지 못한 남성과 동료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맞추어 살자니 공부가 끝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대표 문장을 하나만 꼽으라면 뒤표지에도 인용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소개해야 할 듯하다. 은유는 첫머리에 등장하는 ‘저자의 말’에 “예정된 말의 실패”를 설명하면서 이런 글을 적어두었다.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