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적폐, 빨갱이와 좌파, 독재, 노조와 기업 간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길은 없나
화해·용서와 포용적 가치 담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메시지가 우리 정치인에게 경종을 울린다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 지 10년째 되던 해 그가 투옥됐던 로벤섬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그가 18년간 투옥돼 생활했던 그 작은 섬은 케이프타운 항구에서 고작 30분 남짓이면 도착하는 곳에 있었지만 항구와 로벤섬을 가르는 바다 물길은 그를 세상과 격리시켜 놓기에 충분했다. 로벤섬 위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기러기들은 대조적으로 자유를 상징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18년을 보낸 1평 남짓 차가운 돌바닥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인권전시관이 돼 있다.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기대에 찬 얼굴로 승선하기 위해 기다리던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1992년 그가 석방되고 난 후 했던 연설을 다시 한번 들어 본다. 그를 둘러싸고 이름을 연호하고 있는 청중을 향해 던진 메시지는 바로 감사, 사랑 그리고 포용이었다. 그의 온화하면서도 결의에 찬 연설은 민주화운동을 함께해온 동지들과 아프리카인, 세계 인권운동가들에 대한 경의 표시와 함께 갈등과 분열의 아픈 과거는 뒤로하고 공동의 미래를 위해 포용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용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를 18년간 감옥에 가두고 탄압하던 백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면서 아픈 과거는 뒤로하고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하는 대목은 가슴 뭉클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세계럭비대회가 남아공에서 열렸을 때 백인선수들이 참가하기를 거부하자 백인 주장을 찾아가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백인과 흑인, 유색인의 공동 조국 남아공을 위해 함께 힘이 돼 주겠느냐는 만델라 대통령의 설득에 주장은 화답한다. 함께 하나가 되겠다고! 그리고 모든 선수들이 합심해 결승에서 남아공팀이 승리하는 이 실화는 2009년 맷 데이먼이 주연으로 연기한 인빅투스(난공불락의 팀)라는 영화로 소개되기도 했다. 인종과 피부색으로 분열된 국가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그의 신념이 만들어낸 감동 이야기다.
2차대전의 암운이 몰려오던 영국민들에게 조지 6세가 전해 주던 라디오 메시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하고 영국민을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히틀러의 공습에 불안해 하던 국민에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끝까지 영국을 지켜내겠다고 다짐한 처칠 총리의 비장한 연설은 연일 이어지는 공습 폭격의 공포 속에서도 국민에게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 돼 주었다. 이 감동스토리도 영화로 만들어져 소개되기도 했다.
1789년 윌리엄 윌버포스는 4시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흑인들의 비참한 무역거래선 생활과 동물보다 못한 노예 생활에 대한 경종을 울려 노예해방 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그의 연설 44년 만인 1833년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노예 금지를 선포하는 인류해방사의 새 역사를 만들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 노예해방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윌버포스의 연설 덕분이다. 180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씨앗도 결국 한 사람의 연설에서 시작됐다. 이렇듯 한 사람의 메시지는 큰 메아리가 돼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된다.
노예해방문제로 남과 북이 갈라져 치른 전쟁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재산도 잃고 슬픔과 원한만이 진한 앙금으로 남아 있던 남과 북 국민에게 링컨의 연설은 다시 하나가 되게 해 주는 기폭제가 되었다. 피 흘려 죽은 영령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미국을 만들기 위해 전쟁의 상처는 덮고 다시 일어서자는 그의 메시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 주었다. 이렇듯 국가 지도자의 연설만큼 강력한 사회통합의 메시지는 없다.
죽어서까지 전 세계인이 경의를 표하는 세계 지도자들의 메시지에는 편을 가르지 않는 인류애의 정신인 사랑과 용서, 포용과 관용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담겨 있다. 과거를 들추고 보복하는 정치적 메시지는 아픈 상처를 더욱 곪게 하는 병원체와도 같다. 갈등과 투쟁, 원한과 보복이 반복되는 사회에서 그 책임은 온전히 사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아프고 힘든 과거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감싸고 치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지도자의 참 도리다. 미래에 살아갈 자녀세대를 위해 기성세대들에게 주어진 책임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치유할 수 없는 반목과 투쟁, 사무친 원한이 쌓이게 되면 사회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울타리를 치고,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상황에서 지도자가 선포하는 포용의 메시지와 몸소 실천하는 행동은 모든 것을 녹여 내는 용광로가 될 수 있다.
만델라와 링컨이 던져 주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 그리고 포용적 가치를 담은 지도자들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 여야 지도자들에게 던져주는 경종이 아닐까. 친일과 적폐, 빨갱이와 좌파독재, 노조와 기업의 극단적 이분법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온 국민을 다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국가발전과 사회통합을 논하는 정치가 하루빨리 정상적인 궤도로 회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