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미안합니다”

입력 2019-03-21 00:01

지난 월요일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냈다. 작은 골목에서 큰 도로로 진입하려는 순간, 무서운 속도로 직진하던 오토바이와 충돌했다. 말 그대로 ‘번쩍’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분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119와 경찰에 신고하고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다. 잠깐의 신분조회와 조사 후 오토바이 운전자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내가 운전하던 차에 다친 분과 사고를 낸 운전자인 나는 뒤로 물러서고 상대의 보험회사와 내 보험회사가 나서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새삼 ‘대리 사회’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다치셨나요” “제가 병원에 같이 가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말은, 나로 인해 다치신 분과의 대화가 아닌 보험회사 직원과의 대화에 불과했다. 거긴 ‘나-너’의 인격적 관계가 아닌 ‘나-상품’의 관계, 혹은 보험상품 대 보험상품의 관계만 발생되는 자리였다.

과일이나 음료를 사 들고 병문안을 가서 ‘너’의 안부를 묻는 일은 조금은 번거롭고 힘든 짐일 수 있다. 애초부터 이런 짐스러움 따위에 매이지 않기 위해 보험 ‘상품’을 산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지금 우리 주변이 이런 상품적인 관계들로 촘촘히 연결돼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대신 죽은 아들의 기일에 해마다 물에서 건짐 받은 사람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죄스러움을 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돌아간 다음 둘째 아들이 어머니에게 저 사람을 이제 그만 오게 하자고 부탁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증오할 대상이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달리 말하면 내게 해를 입힌 대상 ‘너’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할 때 ‘나’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는 것이다.

내게 해를 입힌 타자이거나 혹은 은혜를 입힌 타자이거나 내 삶의 관계망에 타자의 자리가 분명할 때 비로소 나의 존재 자리도 제 의미를 갖게 된다. 그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든지 아니면 그가 내게 미안함을 표현하든지 그로 인한 얼마간의 짐스러움을 서로 짊어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사랑과 사랑과 사랑은 항상 있기 어려울진대 미안과 미안과 미안은 항상 있을 것이어서 힘을 다해 머리를 숙인다”는 글을 남긴다.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나는 자꾸만 많이 미안하다.

내 짐이 귀찮고 버거워서 나를 대신해 짐을 질 수 있는 대리인을 돈으로 호출하는 이 사회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옛 교훈을 더듬어 찾고 구한다. ‘나-그것(상품)’의 세계에서 너의 짐을 기꺼이 나눠질 수 있는 나의 존재감이 살아있는 ‘나-너’의 세계로 옮기지 않는 한, 나는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자리는 때로 짐스럽고 심지어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지우고 대신 ‘그것’(상품)으로 대체해버리는 순간, 우리 역시 그에 의해 ‘너’의 자리에서 추방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끔찍한 혐오와 여러 폭력의 문제는 이런 ‘나-너’의 자리를 잃은 데서 기인한 결과일 것이다.

“미안합니다.” 올봄에는 나의 부주의와 미성숙으로 괴로움을 끼친 몇몇 ‘너’의 곁을 찾아가서 미안함으로 무른 말 몇 마디 다정하게 나누고 싶다. 마음의 빚을 덜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서로 사랑의 빚을 더 짊어지기 위해서라고 해두고 싶다. ‘너’의 자리에 오로지 ‘너’를 초대하고 싶은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서다. 그래야 이 아름다운 계절에 ‘나’의 자리도 겨우 보이기 때문이다.

김주련 대표 (성서유니온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