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전국교회를 돌며 간증 집회를 인도한다. ‘둥지’를 부르며 “여러분, 우리 모두 교회에 둥지를 틀까요”라고 외치면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한다.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작한 것은 2015년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에서였다. 믿음이 늦었던 만큼 성령이 날 단단히 붙잡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처럼 늦게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가 한 명이라도 더 복음을 접할 수 있도록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내가 처음 교회를 접한 건 목포북교초등학교 5학년일 때다. 학교 바로 옆에 양동교회가 있었다. 광복 직후 초대 전라남도지사를 지냈던 이남규 목사가 시무한 교회다. 이 목사는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목포를 이끌어가던 큰 어르신이었다. 선친과는 의형제 사이였다. 이 목사의 막내딸은 나의 초등학교 1년 후배였다.
양가가 깊이 왕래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촌 형은 양동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골목대장 노릇을 했던 형이었지만 신앙만큼은 진지했다. 하루는 그 형이 ‘교회에 와서 특별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해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았다. 있는 힘껏 노래를 불렀다. 어렸지만 노래를 제법 불렀나 보다. 하나님께서 내 특송을 듣고 귀여워서 가수를 시켰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그 후 하나님을 모른 채 40년을 살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조직폭력배의 흉기에 찔리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그런데도 나의 생각과 의지, 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들었다. 젊고 건강했고 용기가 있었다. 기도 한 번 하지 않았다.
1991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으며 나 자신만이 아닌 다른 이도 둘러보게 됐다. 존경받아 마땅한 선배들이 생각보다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접했다. 세상 모든 인기와 명예가 덧없이 느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남은 내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모든 일을 오롯이 스스로 할 수는 없다는 걸 절감했다.
그때 가수분과위원회와 친하게 왕래하던 목사님이 한 분 있었다. 수천만원을 들여 선배들에게 동남아여행을 보내주는가 하면 별세한 선배의 장례식도 직접 치러줬다. 겨울이면 생활이 어려운 선배들에게 꼭 한 벌씩 따뜻한 점퍼를 선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재벌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이분은 왜 그럴까 생각했다. 교회를 다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호기심에서였을까. 그 목사를 만난다며 몇 차례 교회를 찾아갔다. 무엇이 그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도록만드는지 궁금했다. 40년 전 양동교회에서 특송을 했던 것까지 떠올리며 신앙이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집 근처 교회에 잠시 다니기도 했고 집에 있을 때 설교 방송을 틀어놓기도 했다. 방송으로 설교를 들으며 그 말씀의 의미를 삶 속에서 되새기려 했다.
그러던 차에 친척인 장욱조 한소망교회 선교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새에덴교회에서 특송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가수 노사연 조영남과 함께 교회를 찾았다. 직후 고향 후배인 바리톤 여현구로부터 “형님, 주일마다 새에덴교회에 나오시오”라며 한 번 더 연락이 왔다. 친한 동생의 부탁이어서 한번 나가겠다고 답했는데 지금까지 새에덴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참 절묘하다. 집에서 설교 방송을 챙겨볼 때부터 믿음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때맞춰 지인들을 통해 교회로 이끌어주셨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