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타임슬립 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눈부신 휴먼드라마였다. 노년의 삶을 야무진 반전과 먹먹한 메시지를 담아 그려낸 ‘눈이 부시게’(JTBC)가 그 주인공이다.
극은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의 부작용으로 갑작스레 70대 노인이 된 25살 김혜자(김혜자·한지민 2인1역)와 청년 이준하(남주혁)의 얘기를 다뤘다. 초반만 해도 로맨스가 주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혜자가 젊음을 되찾아 사랑을 이루는 스토리라 지레짐작한 탓이다.
10회 엔딩은 이런 순진한 예상을 단박에 부쉈다. 김혜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이었다. 25살 혜자는 할머니가 된 김혜자가 그토록 그리던 눈부신 시간들이었다. 병상에서 깨어난 김혜자는 읊조리듯 말한다.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꾼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꾼 건지.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극은 이 반전을 발판 삼아 공감의 힘을 지닌 휴먼드라마로 거듭난다.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치매 노인은 그들을 돌보는 가족의 눈으로 비춰졌다. 그들은 가족을 힘들게 하는 짐이었다. 하지만 혜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 조금 늙었을 뿐 그들도 우리처럼 그저 아름다운 추억을 되뇌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과장되게 느껴졌던 극 중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것도 이때쯤이다. 등장인물들의 예스러운 복장과 설정이 그렇다. 준하가 경찰서에 갇히자 혜자는 군사정권 시절인 양 경찰의 고문을 의심하며 따지고 든다. 음모에 빠진 준하를 구출하기 위해 노인들이 활극을 펼치는 모습도 혜자의 상상이었음을 암시한다.
혜자를 거쳤던 시선은 사회 병폐를 꼬집는 데까지 나아간다. 오빠 영수(손호준)의 1인 방송에 나온 혜자를 우스갯거리 삼는 네티즌들의 모습은 노인혐오의 한 단면이다. 백수이거나 파트타임으로 전전하는 영수와 혜자의 친구들은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표상이고, 25년째 동네 미용실을 운영하는 혜자의 엄마와 택시 모범운전자인 아빠는 성실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서민의 은유다.
꾸준히 오른 시청률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보여준다. 3%(닐슨코리아)대로 시작해 입소문을 타며 7~8%까지 올랐다. 국민 배우 김혜자와 한지민 손호준 남주혁 등 배우들의 구멍 없는 호연이 힘을 보탰다. 진지한 와중 유머를 잃지 않은 연출도 흥행을 이끈 요인이다.
12부작으로 사전제작된 드라마는 19일 종영한다. 시간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은 ‘인생의 매 순간이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마련이다. 극은 좀 더 직접적이다. 혜자는 “내 인생이 불행했다고 생각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과 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희로애락이 겹겹이 쌓인 노년은 청년의 시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눈부시게 빛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