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1876~1949)는 1947년 출간한 회고록 ‘백범일지’에서 문화 강국의 꿈을 이렇게 표현했다. 해외에서 항일 무력투쟁을 이끌었던 백범이 36년간의 일제 식민 지배를 갓 벗어난 상태에서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문화의 힘을 우선시한 것은 의외로 느껴진다.
백범은 이 글에서 다방면으로 문화의 의미를 조명했다. 그는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와 자비,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라고 강조했다. 문화를 인류애적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평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백범은 또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준다”면서 “(문화가 융성한 나라는) 불행하려 해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해도 망할 수 없다”고 적었다.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존속 요건으로 문화를 꼽은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의 이 글은 임시정부가 꿈꿨던 문화 강국의 청사진이 압축적으로 잘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시헌법과 건국강령 등 임시정부가 발표한 주요 문서에도 ‘문화’가 몇 차례 언급됐다. 특히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공포한 건국강령에서 임시정부의 핵심 이념인 ‘삼균주의’(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추구)와 문화를 결부해 문화의 발전을 건국의 주요 과정으로 적시했다. 건국강령 3장 2항은 ‘삼균 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해 (중략) 경향(서울과 시골) 각층의 극빈 계급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 정도와 문화 수준이 제고(提高)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한다’고 적혀 있다. 3장 4항에는 ‘두레농장·국영공장·생산소비와 무역의 합작기구를 조직해 농공대중(농민·근로자)의 생활 수준과 문화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내용도 있다. ‘삼균’의 하나인 경제적 균등을 추구함으로써 문화의 힘을 높이겠다는 구상으로 문화가 결국 삼균주의의 결과물이라는 의미도 담긴 셈이다.
완전한 무상교육을 꿈꿨다
임시정부에 교육은 문화 강국을 견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문화의 힘을 강조한 뒤 “이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라며 “내가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라고 했다. 건국강령에서 언급된 경제적 균등뿐 아니라 정치적 균등(참정권)과 교육의 균등(국민교육)도 문화 발전의 중요한 전제조건임을 밝힌 것이다.
임시정부는 교육받을 권리를 참정권, 경제권과 함께 ‘인민(국민)의 세 가지 권리’에 포함시킬 정도로 교육권을 중시했다. 양반 자제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조선시대와 달리 임시정부는 성별, 빈부 차별 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상교육을 추구했다.
건국강령 3장 7항에는 ‘6세부터 12세까지 초등교육과 12세 이상의 고등 기본교육에 관한 일체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의무로 시행함’이라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고등 기본교육은 오늘날 중·고교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임시정부의 교육정책을 연구한 강내희 중앙대 명예교수는 18일 “임시정부가 학력의 균등을 지향했던 점을 고려할 때 임시정부는 오늘날 서구 국가들이 실시하는 대학 무상교육까지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임시정부는 또 건국강령에서 ‘빈한한(가난한) 자제로 의식(옷과 음식)을 스스로 갖추지 못하는 자는 국가에서 대신 제공한다’고 적시해 무상급식과 무상교복 구상도 밝혔다. 아울러 ‘학령이 초과되고 초등 혹은 고등 기본교육을 받지 못한 인민에게 일률로 면비(비용 면제) 보습교육을 시행한다’고 해 국가의 평생교육 지원 구상도 담았다. 모두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제안들이다.
임시정부가 이처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교육 구상을 담은 것은 임시정부의 사상적 설계자로 꼽히는 조소앙(1887~1958)의 영향이 컸다. 그는 임시정부 수립 9년 전인 1910년 재일 한인 유학생 단체 기관지인 대한흥학보에 기고한 글에서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사상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 여러 요인 중 ‘국민의 자각’과 ‘교육의 진보’를 제1 요인으로 꼽았다.
임정보다 퇴보한 現 교육과 문화
임시정부가 그렸던 교육 구상은 광복 이후 제헌헌법(1948년)을 거쳐 오늘날 헌법에도 일부 반영됐다. 헌법 16조는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 모든 교육기관은 국가의 감독을 받으며 교육제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돼 있다. 교육법에 명시된 아동의 교육받을 권리나 국가의 학교 설치 의무도 임시정부 건국강령에서 규정한 내용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무상교육의 범위 등에서는 오히려 임시정부 구상보다 후퇴한 것들이 많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현재에도 국가가 지원하는 무상교육은 중학교까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 고교 무상교육을 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무상급식도 올해 들어서야 전국에서 실시됐고, 무상교복은 일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강 명예교수는 “빈부격차가 교육격차로 이어지고, 각종 사회 갈등으로 신음하는 오늘날 한국은 70여년 전 임시정부가 꿈꾼 모습보다도 훨씬 후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