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준비는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 느닷없이 소요가 시작됐다. 직원들이 문을 가로막았지만 학생들은 밀치고 나가 만세 행렬에 동참했다. 많은 학생들이 투옥됐다.”
1919년 6월 이화학당 선교사들이 미국 여성해외선교회 본부에 보고한 내용 중 일부다. 3·1운동의 그날 이화학당 교정엔 만세 소리가 졸업식 축가 연습을 대신했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거리 시위에 참여한 뒤 군중을 학교로 인도해 교내에서도 시위를 이어갔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지난 15일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임시정부에도 기여하는 등 ‘여성 지도력’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를 근대교육과 신앙교육에서 찾았다. 이화여대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서대문구 대학 ECC이삼봉홀에서 ‘3·1운동, 여성 그리고 이화’를 주제로 연 학술대회에서다.
이 교수는 “1886년 개교한 이화학당은 한글 한문 영어를 가르치는 언어교육, 성경과 기도를 가르친 종교교육에 토론교육까지 하며 여성 지도자들을 키웠다”면서 “서양인과 비슷한 한국인을 만든 게 아니라 ‘보다 나은 한국인’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스스로 독립을 꿈꿨다. 이 교수는 “이화학당 기숙사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진명여학교 등 서울시내 사립여학교 학생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꿈꾸는 공간이었다”면서 “일경도 이 사실을 알고 3월 10일 ‘기숙사 회합’을 명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신주려와 박인덕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화학당은 다수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하란사 박승일 이화숙 유예도(애족장) 조신성 황애덕 최매지 권애라(애국장) 이애라(독립장) 신마실라 김독실 유점선 노예달(대통령표창) 신특실(건국포장) 유관순(대한민국장) 15명이 건국공로 포상을 받았다.
이화여대는 지난 4일부터 중앙도서관에서 ‘3·1운동과 이화’를 주제로 전시회를 갖고 있다. 오는 5월 21일부터는 ‘이화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전시회도 한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