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바야흐로 기업들은 시장의 주도권을 쥐는 고령 인구에 주목해야 한다고. “노인에 의한 소비”와 “노인을 위한 소비”가 미래엔 시장을 주무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글까지 덧붙인다. “(고령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마치 대륙 하나가 바닷속에서 새로 쑥 솟아오른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대륙에는 이제 공기로 숨을 쉬어야 하는 소비자가 10억명 넘게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며 숨통을 틔울 물건을 애타게 찾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으면 많은 이들은 이런 생각부터 하게 될 듯하다. 지구촌 곳곳이 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이라는 예견이 나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나. 고령 소비자의 “숨통을 틔울 물건”은 이미 시장에 많이 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책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를 읽으면 기업들이 얼마나 이 시장에서 헛발질만 반복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을 펴낸 조지프 F 코글린은 50대 이상을 위한 기술이나 디자인을 연구하는 미국 ‘MIT 에이지랩’의 창립자다. 그가 주목하는 건 베이비붐 세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에서는 출산율이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이때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이른바 ‘시니어 비즈니스’의 중요성을 끌어올리는 끌차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이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많이 다르다. “경제적 요구에 따라 주변 세계를 바꾸며” 살아왔고, “자손에게 돈을 물려주는 걸 중요치 않게” 여긴다. 그러면서 동시에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있다. 미국만 하더라도 50세 이상 소비자가 가계 자산의 83%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노년의 욕구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미국에서 이뤄진 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31%만이 고령화에 대비해 시장 조사를 벌이거나 판매 계획을 짠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조사를 보면 15%의 기업만이 고령층에 초점을 맞춘 사업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이른바 ‘장수 경제(Longevity Economy)’ 시장에 뛰어든 선도적 기업들이 내놓는 상품들마저도 매력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효도폰’으로 일컬어지는 휴대전화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독일의 한 회사는 2007년 ‘카타리나 다스 그로스’라는 효도폰을 내놓았다. 기능을 단순화시키고 버튼을 크게 만들었으며 떨어뜨려도 잘 깨지지 않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이 핸드폰은 시장에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회사는 2010년 문을 닫았다. 왜 효도폰은 실패했을까. 한 소비자는 이런 후기를 남겼다.
“튼튼하고 버튼도 쉽게 구별할 수 있어요. 잘못된 점은 하나도 없어요. 다만 너무 크고 무거워요. 핸드백에도, 주머니에도 들어가지 않아요. 어머니는 이 제품에 익숙해지는 데 무척 애를 먹고 있어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장애인’을 염두에 두고 이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책에는 이렇듯 노인 시장 공략 전략을 허투루 세웠다가 처참한 실패만 맛본 제품의 사례가 한가득 실려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실패담은 끊이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노인의 관점에서 이들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다가올 고령화 시대는 능동적인 소비 생활을 해왔던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권을 쥐게 돼 있다. 저자는 편견과 억측을 버리고 시장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한다.
“상품이 미래의 장수 경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고령 소비자를 응급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환자나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로 취급하면 안 된다. 욕구와 열망을 인정하고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품이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을 쟁취하면 나이에 내포하는 의미도 변한다. …이제 장수 경제 시장에 진입해 승리를 거머쥘 시기가 무르익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당부다. MIT 에이지랩이 25~60세를 대상으로 65세 이후의 삶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남성 응답자와 여성 응답자의 답변은 많이 달랐다. 남성은 여가나 휴가처럼 “결과 지향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했지만, 여성은 투자나 연금과 같은 “과정 지향적인 단어”로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은퇴 이후 가계의 소비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저자는 “남성이 여가 중심의 은퇴라는 막연한 장밋빛 미래로 노년을 그리는 반면 여성은 더욱 선명하고 더욱 가혹한 관점에서 노년을 바라본다”며 “이 차이는 소비자가 주머니 사정에 따라 현재의 노령 개념에 반기를 들 때 그 맨 앞에는 여성이 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적어두었다.
주로 미국의 시장 변화를 토대로 쓰인 만큼 한국의 현실과 딱 들어맞지 않는 부분도 없지 않다. 한국의 경우 노인 빈곤율이 상당할 정도로 고령층의 지갑이 얄팍해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3년 기준 OECD 국가들의 노인 빈곤율을 조사했을 때 한국은 그 비율이 49.6%로 OECD 평균(11.4%)에 비해 4.35배나 높았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장수 경제가 앞으로 한국사회를 뒤흔들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사실일 것이다.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는 많은 기업들이 숙독해야 할 참고서일 듯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