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이후 고용 되레 악화, 미래 불안한 노동자들 배수진

입력 2019-03-12 04:01
신정웅(가운데) 알바노조 비상대책위원장이 11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S타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탄력근로제 확대 반대’ ‘경사노위 해체’ 등을 요구하고 있다. 경사노위는 이날 3차 본위원회를 개최하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안건 등을 의결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뉴시스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셈법의 덫’에 빠졌다. 3차 본위원회마저 아무런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탄력근로제 확대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이 촉매로 작용했다. 첫 사회적 합의로 여겨지던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6개월 연장안은 청년과 여성, 비정규직 대표자의 잇단 본위원회 불참으로 빛이 바랬다.

파행의 이면에는 복잡한 고용시장 상황이 존재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주52시간 근로제가 본격 도입됐지만 ‘일자리 나누기’가 작동할 것이라던 정부 기대와 달리 고용시장은 악화됐다. 300인 이상 대기업부터 주52시간 근로제를 단계 적용하는 게 공교로운 결과를 낳았다. 대기업일수록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추가 고용 효과가 적다. 임금을 보전하면서 근로시간을 줄이려니 추가 고용 여력이 부족한 탓도 있다. 근로시간이 줄었는데도 일자리가 생기지 않으면서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면 더 일자리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구조적 불안감이 노동자들에게 배수진을 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사노위는 11일 비공개로 3차 본위원회를 열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연장안을 포함한 3건의 합의안 의결을 시도했다. 지난 7일 2차 본위원회에 불참한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자의 참석이 필수 요건이었다. 경사노위에 따르면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 3명은 당초 참석 의사를 밝혔다가 회의 개최 직전에 불참을 통보했다. 이들은 별도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첫 합의가 탄력근로제 확대라는 노동권 후퇴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은 “이런 상황에 대해 엄중하게 인식한다”고 했다.

청년·여성·비정규직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6개월로 연장하는 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고용시장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주52시간 근로제를 적용했다. 기존(주당 최대 68시간)보다 줄어든 시간만큼 새로운 고용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난해 6월만 해도 전년 대비 10만명 이상 증가했던 취업자 수는 7월부터 급락했다. 지난해 8월에 전년 동월 대비 3000명 선까지 떨어졌던 취업자 수 증가폭은 여전히 회복불능에 빠져 있다.


여기에다 근로시간을 줄여도 300인 이상 대기업의 고용 효과는 미미하다. 2004년 7월부터 기업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도입된 주5일 근무제가 대표 사례다. 한국인사관리학회는 당시 300인 이상 기업 가운데 고용을 늘린 곳은 거의 없다는 분석을 내놨다. 반면 300인 미만 중견·중소기업의 경우 3.5%가량 고용이 증가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종사자 50인 이상~100인 미만 기업에 주52시간 근로제를 적용하는 2020년 1월부터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고용 증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노조의 임금 보전 요구도 약점으로 꼽힌다. 근로시간을 단축하면 임금이 감소한다. 노조는 근로시간을 줄여도 임금이 감소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임금이 그대로인데 근로시간만 줄면 기업의 추가 고용 여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를 상쇄하려면 생산성이 늘어나고 자본 여력도 증가해야 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의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경제적 영향’ 보고서를 보면 생산성이 최소 1%, 자본가동률은 5% 이상이어야 고용이 유지된다. 이 조건을 못 채우면 올해 기준 10만3000명 수준의 고용 감소가 나타난다는 암울한 전망도 덧붙였다.

그나마 노조에 소속되지 않은 청년·여성·비정규직은 임금 보전과 같은 요구를 하기도 힘들다. 고용마저 열악한 상황에서 근로조건이 더 나빠지는 탄력근로제에 이들이 찬성하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소장은 “탄력근로제 확대가 경사노위에 첫 합의안이 되는 순간 미조직 대표들의 입지는 없어진다”고 말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