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주도홍] 상처입은 치유자로 나서야

입력 2019-03-08 04:02

우리 민족을 일컫는 단어는 한이다. 한은 상처이며, 상처가 문드러지고 굳어져서 내면화되어 버린 것이다. 내면화된 상처는 긍정적으로는 침묵의 성숙을 지향하기도 하지만, 이 상처가 성이 나서 아픈 내면을 후벼 팔 때면 소리쳐야 하는 민족이 우리이다. 그 상처가 치유될 때가 되었지만 남북의 분단은 그 상처를 생채기 내 독하게 아픔을 감내하기도 하며, 어쩔 수 없이 소리쳐 밖으로 토하기도 한다. 깨어진 가정에서 문제아가 나오듯, 깨어진 나라에서 문제의 사람들이 나온다.

얼마나 독하게 이념논쟁을 하는지 실상을 보라. 거친 입의 국회의원을 보고, 이념에 경도된 정치인들의 언어를 살펴보라. SNS에 그려지는 사람들의 입에 담기도 어려운 험한 댓글을 보라. 종교인들이라는 자들의 그 험한 말들을 쏟아내는 독한 입을 주목하라. 그들은 깨어지고 싸우는 두 동강 난 한반도에서 상처 입은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의 상처가 내면을 후벼 팔 때, 그들도 그 아픔을 참지 못하여 정신을 잃고 독한 소리를 토하는 것이리라. 상처가 치유되어 부활의 예수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헨리 나우웬)가 되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들은 도리어 그 상처를 이웃에게 전가하는, 아니 그 상처 때문에 이웃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성난 사람들이다. 그 예가 5·18 망언이다.

지난 2월 27~28일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장밋빛 전망을 지녔던 한국을 포함한 세계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북은 이전처럼 서로를 원수 삼아야 하는가. 핵을 머리에 이고, 비싼 전쟁 연습을 계속하고, 적대감을 고조시키며, 격한 말을 서로에게 쏟아내야 하는가. 남남갈등, 남북갈등을 일상화하며 힘든 삶을 짊어져야 하는가. 그토록 남북관계는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인가. 우리도 남들처럼 평화롭게 오순도순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순화되어야 하는데, 상처들이 치유되어 주고받는 말들이 보드랍고 고와야 하는데 말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음을 아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한 민족이 아닌가. ‘그까짓 아픔쯤이야’ 속으로 삭이며, 다시금 시련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저력을 가진 큰 민족, 한 민족이 아닌가.

우리는 언젠가부터 체질적으로 순풍에 돛 단 듯이 가는 인생이 아님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알고 있다. 인내할 줄 아는 풀뿌리 민족이 아니었던가. 이제 위기를 기회로 삼아 북·미 간 중재자 역할뿐 아니라 남북이 할 수 있는 일을 긴 호흡으로 멀리 바라보며 걸음을 다시 내디뎌야겠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의 관계도 차분히 다지며 그들 사이에 싸인 크고 작은 담들도 헐어내야 한다. 일본에 맺힌 원한도 미래지향적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은밀히 연구하고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회개의 위대성을 아는 기독교 국가 독일을 닮으라는 요구는 겉체면에 목숨 거는 일본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긴 안목의 철학과 소신으로 우리의 걸음을 걸어야 하겠다. 미국이든 북한이든 일본이든 상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겠다.

지도자는 설득하는 자이다. 그저 눈치나 보는 약삭빠른 여우가 아니어야 한다. 정권 욕심에 혈안이 된 그런 조무래기들이 어쩌다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곰처럼 그 길을 뚜벅뚜벅 가되, 지혜와 인내와 소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길을 가기가 쉽지 않겠지만, 인류 보편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확고히 붙잡는 것이다.

사랑이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것으로, 인권과 박애 그리고 평등을 지향하는 삶이다. 평화란 다름을 획일로 강요하지 않고, 관용과 조화로 품으며, 폭력을 멀리하며 오순도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주도홍 백석대 전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