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 이번에는 국왕 아버지와 파열음, 인사 외교에서 이견

입력 2019-03-07 04:02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온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이번에는 아버지 빈 살만 압둘아지즈 국왕과도 불화를 빚고 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인사와 외교정책 등 국왕의 권한을 침범하면서 갈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5일(현지시간) 최근 압둘아지즈 국왕과 빈 살만 왕세자가 중요한 정책 문제 등 곳곳에서 이견을 보이는 조짐이 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지난 2월 압둘아지즈 국왕이 이집트에 방문했을 때 수면 위로 드러났다. 사우디 정부는 국왕이 이집트로 출국한 다음 날인 지난달 24일 리마 빈트 반다르 사우드 공주를 미국 주재 사우디대사로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리마 대사는 스포츠청 부청장으로 일하며 여권 강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의 주미 대사 임명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엄격히 제한해 온 사우디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던 인사여서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전임자인 칼리드 빈 살만 대사는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돼 국방장관을 겸한 친형 빈 살만 왕세자를 보좌하게 됐다.

그런데 정작 압둘아지즈 국왕은 이 인사를 이집트에서 TV로 처음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왕실의 임명 인사는 항상 국왕 이름으로 발표됐지만, 이번 주미 대사 인사 칙령에는 ‘국왕 대리(deputy king)’가 서명했다. 사우디에선 국왕이 자리를 비우면 왕세자가 국왕 대리를 맡는 게 관례지만, 왕실 주요 인사는 국왕의 고유권한이라 국왕 대리가 결정한 경우가 없었다. 빈 살만 왕세자가 국왕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주요 인사를 단행한 것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당시 이집트에 있던 압둘아지즈 국왕의 참모들은 이집트 일정에 위험이 따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압둘아지즈 국왕도 이들의 경고를 받아들여 즉시 30명의 경호팀을 새로 꾸렸다. 해외 공식방문 일정 중 경호팀을 교체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경호팀 일부가 빈 살만 왕세자의 충성파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압둘아지즈 국왕이 25일 이집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도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다. 브루스 리델 브루킹스 연구소장은 “빈 살만 왕세자가 공항에 나가지 않은 것은 사우디 왕실에 문제가 있다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신호들”이라고 지적했다.

사우디 국왕 부자는 빈 살만 왕세자가 지난해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총영사관에서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한 배후로 지목된 후 갈등을 빚어왔다. 최근에는 예멘 전쟁의 포로 처리 문제나 알제리 반정부 시위를 사우디 언론에 보도해야 하느냐를 놓고도 충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세력을 강경하게 찍어 누르는 빈 살만 왕세자를 압둘아지즈 국왕이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불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달 파키스탄과 인도, 중국을 연달아 순방하며 대규모 투자 계약을 맺었다. 카슈끄지 사건 직후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됐던 것을 감안하면 성공적으로 국제무대에 복귀한 셈이다. 미국 정부도 이 사건 조사에 여전히 미온적이다.

물론 빈 살만 왕세자가 아직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형편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사우디 왕실은 건국 이후 관행적으로 부자 세습이 아닌 형제·연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왔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삼촌과 사촌들을 모두 축출하고 왕세자에 올랐다. 부자 상속이 이례적인 상황인 만큼 아버지 빈 살만 국왕의 후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닐 퀼리엄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빈 살만 왕세자가 변화를 이끄는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발휘하려는 의지를 내보이고는 있다”면서도 “아직은 아버지의 지지가 필요한 만큼 아버지 의사에 반하는 쪽으로 밀고나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