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거리와 마감일로 머릿속이 잔뜩 복잡한 채로 걸음마저 서두르며 문을 나서다 멈칫, 놀랐다. 겨울이 가버렸다. 두터운 외투를 두르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이리저리 분주히 살아가기를 두어 달, 그동안 눈길조차 주지 못했던 나뭇가지를 살펴보니 아주 조그맣게 초록 새순이 달려있다. 신통하다. 그제야 기대 어린 눈으로 땅을 둘러보니 부지런한 생명은 벌써부터 봄 준비로 들썩인다. 그다지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크게 켜며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켰다. ‘후아~.’ 비록 독성물질 가득한 초미세먼지로 뒤덮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매캐한 공기 사이로 봄기운은 여지없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숨을 들이켜며 살았는데. 그 들숨을 통해 세상 존재들의 생명의 기운도 함께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는데. 밝으면 밝은 기운이, 슬프면 슬픈 기운이, 분노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분노의 기운이, 늘 우리 안으로 그렇게 전달되며 사는 것이 존재의 법칙인데. 우리가 들이키는 들숨 안에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도 함께 계신데, 자꾸 그걸 잊는다.
바빠서만은 아니다. 성경은 이웃과 뭇 생명의 존재가 내뿜는 기운과 나아가 성령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러니까 제대로 들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의 종류를 두 범주로 설명한다. 하나는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이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대표적이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자유와 평화의 땅으로 내보내라는 계시를 전달받고도 이를 자기 안으로 들여놓지 못했다. 수많은 노예들을 발아래 두려는 통치자의 욕망을 넘어서지 못했다. 존재의 숨구멍이 꽉 막혀서 그렇다. 눈이 뚫렸으면 바로 보아야 하고 귀가 뚫렸으면 바로 들어야 하고 뚫린 입으로는 건강한 영양분을 흡수해야 하듯이, 사람은 ‘존재의 숨구멍(the porosity of being)’을 통해 들숨과 날숨을 쉬어야 한다. 제법 그럴 듯하게 이름을 붙여서 요즘 내가 묵상 중인 신학적 개념어이다. 확고한 자기 답으로만 가득해서 점점 존재의 경계가 견고해지고 존재의 숨구멍이 굳어지는 사람은 이웃의 신음소리는커녕 하나님의 임재도 거부하게 된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교만’하다고 한다.
한편 제대로 들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는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도 있다. 모세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도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믿지 못한 까닭을 성경은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세상 풍파에 마음이 상한 사람, 하여 자기를 포기해버린 사람, 하나님의 형상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 꿋꿋하게 주체로 서려는 노력을 포기한 사람은 자기 존재의 ‘경계(boundary)’를 제대로 건설하지 못한다. 자기 경계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타자의 의미에 휩쓸리고 휘말린다. ‘내’가 없어서 그렇다. 이런 상태도 스스로 쉬는 들숨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발견하고 마주할 힘이 없기에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교만도 아니고 자기포기도 아닌 그 사이에 사람의 들숨이 가진 거룩한 힘이 있다. 무엇이 ‘거룩’일까?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뛰어넘고 자기를 포기해 버리려는 좌절을 극복하는 존재의 힘, 결코 내 안에서 내 힘으로만은 되지 않기에 큰 호흡으로 들이 마셔야 하는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이다. 때론 성령과 교통하며 생명의 날숨을 내어 쉬는 영성 깊은 이웃으로부터 전달받는 힘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생명은 들숨을 제대로 쉬어야 날숨도 쉬는 법이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적으로 쉬어야 살 수 있다. 생물학적 숨만이 아니라 영혼의 숨도 그러하다. 이 둘을 다 쉬어야 제대로 된 존재의 숨쉬기이다. 어쩌면 죽음 아니면 죽임만이 선택지라고 ‘뻔뻔하게’ 내뱉는 오늘의 세상은 우리가 제대로 존재의 숨쉬기를 하지 못해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 봄에 생명의 숨을 쉬자. 이기심과 좌절을 넘어서는 거룩한 존재의 힘을 내 안에, 네 안에, 우리 안에서 만들고 나눌 수 있도록.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