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선 미칠 거 같아” 8평 다섯식구, 주거빈곤 아이들의 호소

입력 2019-03-09 04:03
사진=게티이미지

정석(19·가명)이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신의 진로를 고민해 볼 시간이 없었다. 패널을 이어 만든 허름한 집은 정석이의 마음에 어떠한 여유도 주지 않았다. 항상 좁았고 조금만 소리를 내도 이웃들이 시끄럽다고 항의를 했다. 그 모든 게 스트레스였다. 정석이는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돼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볼 여유조차 없었다”고 했다. 현재 좀 더 나은 곳으로 이사를 간 정석이는 “좀 더 빨리 이사를 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라고 했다. 좀 더 빨리 자신이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해볼 수 있었다면 좋았다는 아쉬움이었다.

정석이에겐 마음의 여유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에서 따뜻한 엄마 밥을 먹는 날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낡은 집에서 살 때는 주방이 좁아 설거지를 화장실에서 해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좀처럼 요리를 하지 않았다. 이사 후 정석이는 “어머니가 밥을 해준다”며 좋아했다.

자라는 아이에게 집은 세상의 거의 전부다. 집은 어른보다 아이에게 더 큰 영향을 준다. 낡고 좁은 집은 가족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주거빈곤아동 문제를 연구해 온 임세희 서울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8일 “좁은 공간에서 가족이 살면 자기 공간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고, 부모도 아이들에게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전가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방이 두 개인 새 집에서 지난달 19일 성희(12·가명)의 어머니가 삼남매 중 막내인 민호(7·가명)를 꼭 안고 있는 모습. 시흥=윤성호 기자

집은 아이들의 삶을 바꾼다. 성희(12·가명)는 지난해까지 원룸에서 삼남매와 부모가 같이 살았다. 26.4㎡(8평) 남짓의 방에서 다섯 식구가 부대끼며 잤다. 방에 펼쳐놓은 건조대 밑에서 잠을 청하면서 서로 부딪히니 아이들은 자꾸 짜증을 냈다.

지난해 12월 18일 성희네는 방 두 개와 주방이 별도로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지난달 19일 찾은 성희네 새 집은 45㎡(13.6평) 크기로 전보다 2배 가까이 넓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보증금 600만원을 지원 받아 이사를 했다. 삼남매가 각자 방을 갖지 못했지만 성희와 동생들은 며칠 밤을 잠을 설칠 만큼 좋아했다. 이삿짐이 채 들어오기도 전에 이불부터 가져와 새 집에서 잠을 잤다.

아이들은 이제 자면서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다. 막내 민호(가명·7)는 “잠을 잘 때 좋아요. 예전에는 자다가 몇 번 깼는데 이제 안 깨요”라고 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성희와 여동생은 아버지와 따로 잠을 잘 수 있어서 기쁘다. 한 방에서 옷 갈아입는 것조차 신경 쓰이던 예전과 달리 이제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된다.

새집 신발장에 차곡히 정리된 신발들. 예전 현관에는 공간이 부족해 신발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시흥=윤성호 기자

예전 집에서는 주방이 현관문 바로 앞에 딸려 있었다. 신발장과 주방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좁았다. 이제 성인 2명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별도 부엌이 생겼다. 성희 어머니는 “예전에는 양파 껍질을 벗길 공간도 없어 그냥 먹는 것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주방에서 뭘 만들기가 편해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고민하고 더 맛있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전했다.

삼남매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 원룸에서는 TV를 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삼남매가 서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공간이 넓어지면서 아이들은 굳이 TV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누군가 TV를 볼 동안 다른 사람은 옆방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논다.

성희네 주거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새로 이사 간 집도 곰팡이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창문이 2개 있지만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아 아침에도 불을 끄면 캄캄하다. 성희 어머니는 “아이들마다 자기 방을 갖도록 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성희처럼 과밀한 주거환경에 사는 아이들의 아동주거권은 보장되지 않고 있다. 임 교수가 아동주거권 관련 연구를 할 당시 아이들은 “집에만 가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호소했다. 현재 과밀주거상태에 놓여있는 아동은 전국 46만 가구다. 이들은 보통 방이 1개나 2개인 집에서 온 가족이 살아 스트레스가 높다. 생존권과 학습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김동민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기아동옹호센터 대리는 “가족 구성원이 똑같이 3명이라고 하더라도 그 중 아동이 포함돼있다면 우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세 미만의 자녀가 있다면 최소한 생존권, 학습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주거환경으로 이전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춘기 아동의 경우 원룸에서 사는 과밀상태에서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아 세계보건기구(WHO)도 “사춘기 자녀가 이성 부모와 같은 방에서 살지 않도록 분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임 교수는 “땅이 좁고 집값이 비싼 한국의 특성도 있고 과거 한 방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던 문화도 있지만 아이의 정서발달을 고려한 주거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며 “국가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주거빈곤가구 아이들 ‘주거급여’ 우선 지원 필요

아동이 있는 주거빈곤가구의 문제는 단순히 집을 구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지원을 받아 보증금을 마련하거나 임대주택에 들어간다 해도 월세, 관리비 등을 지속적으로 부담할 수 없다면 다시 주거빈곤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5일 경기도 시흥시에 따르면 이곳은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아동이 있는 주거빈곤가구에 주거급여를 가산해 제공하고 있다. 정부 주거급여의 절반 수준에 아동 수에 따라 지원 금액을 30%씩 추가하고 있다. 대상은 중위소득 60% 가구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주거급여 대상에서 빠지더라도 시가 보전해줄 수 있다. 월세 부담을 줄여 빨리 더 나은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도록 돕거나 현재 거주 중인 주택에 계속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시흥시는 이를 위해 시비 10억원을 예산으로 책정했다.

시흥시는 보증금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불법 쪼개기’한 원룸촌에서 월세를 얻어 살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거급여를 대안으로 마련했다. 이곳들은 최소한의 주거 면적 등 최저주거기준도 갖추지 못해 채광, 방음에 취약하고 한 가구가 살기에 공간이 턱없이 좁다. 지난달 19일 찾은 정왕동의 한 원룸 주차장은 자동차 6대가 주차할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의 가구 수를 나타내는 가스 계량기는 18개였다. 6가구가 들어와야 할 원룸을 몰래 쪼갠 것이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아동이 있는 주거빈곤가구에 우선적으로 주거를 지원하도록 관련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개정안은 주거기본법 제3조의 ‘주거지원 우선대상자’에 장애인, 고령자뿐만 아니라 아동을 포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동이 있는 가구에 무보증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할 수 있는 정책도 제언한다. 주거기본법 제3조가 명시한 ‘주거 지원 필요 계층’(현재 신혼부부, 청년층)에 아동을 추가하는 것이다.

임세희(오른쪽) 서울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양민호 시흥시 주택관리팀장이 지난달 19일 정왕동 원룸촌을 돌아보며 과밀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흥=윤성호 기자

양민호 시흥시 주택관리팀장은 “궁극적으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원룸을 사들여 민간기업에 리모델링을 위탁한 뒤 저렴하게 임대하는 사회주택을 이상적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흥=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