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을 볼모로 삼다니”… 상처·불신 학부모들 ‘유치원 엑소더스’

입력 2019-03-06 04:02
서울의 한 유치원생이 엄마의 손을 잡고 등교하는 모습. 한유총의 전날 개학 연기 철회로 대부분 유치원은 이날 정상화됐다. 최현규 기자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개학 연기 투쟁은 끝났지만 학부모들의 상처와 불신은 깊게 남았다. 유치원이 아이를 볼모로 삼았다는 사실에 학부모들은 원장과 교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유치원을 그만두고 어린이집이나 홈스쿨링으로 옮기는 이른바 ‘유치원 엑소더스’ 현상까지 나타났다.

5일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인 ‘맘 카페’ 여러 곳에는 ‘유치원을 퇴소했다’는 글이 줄이어 올라왔다. 대구에 사는 한 학부모는 “방금 유치원을 입학 취소하고 왔다”며 “당분간 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학원이나 문화센터를 병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다른 학부모도 “2년간 웃으면서 보고 지냈던 원감 선생님께 퇴원한다고 말하고 왔다. 원감이 ‘이제 다 잘 마무리됐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죄송하다고 했다”고 했다. 비슷한 내용의 글은 한유총 개학 연기 투쟁 전후로 잇따라 게시됐다.

학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깐깐하게 고른 곳인데 배신당했다’고 토로했다. 대구 달서구에서 5세 아들을 키우고 있는 김모(40)씨는 “교육과정을 살펴 고르고 고른 유치원이었는데 개학 연기에 동참해 너무 실망했다”며 “유치원 경영엔 원장 마인드가 많이 반영되는데, 아이들을 본인의 의견 관철 수단으로 여기는 곳에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아 퇴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부산에 사는 A씨(34)는 “바깥 활동이 많은 곳을 여러 군데 알아보다가 숲속 유치원을 선택했다”며 “원장이 개학 연기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나를 이상한 엄마로 몰아 신뢰가 깨졌다”고 했다.

맘 카페 게시판에는 “가만 있으면 안 된다”는 독려 글도 잇달았다. 7세 아들을 둔 B씨는 “아들이 5세 때부터 매년 휴원 압박을 받으며 유치원을 보내 왔다”며 “내 아이가 인질로 잡혀도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텨왔는데 반성한다. 다른 엄마들도 이런 생각을 버리길 바란다”고 했다. 개학 투쟁에 참여한 유치원을 전날 퇴소했다는 다른 학부모도 “그들만의 단체를 위해서 아이들을 외면한 유치원은 계속 꼬리표가 붙길 바란다”고 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5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한국유치원총연합회에 대한 설립 허가 취소 절차를 예고대로 진행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한유총의 사실상 패배가 불러올 후폭풍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는 학부모도 적지 않았다. 전날 개학 연기를 철회한 서울의 한 유치원에 자녀를 등원시킨 최모(39)씨는 “개학 연기 문자를 받고 바로 유치원에 전화했는데 ‘누구 아이의 어머니냐’고 물었다. 정상 개학 후 아이에게 불이익이 갈까 덜컥 겁이 났다”고 했다.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은 이날 한유총과 소속 유치원들을 공정거래법과 유아교육법 등 위반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 단체는 “한유총이 개학 연기를 주도해 최소 2만3900명의 아이들이 헌법상 교육권과 보호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불법적 휴원은 아이들의 교육과 일·가정 양립의 평온을 위협하는 아동학대 수준의 범죄”라고 강조했다.

안규영 최지웅 정진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