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문 도출에 실패했다. ‘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이미 첫 만남 장면부터 실패의 조짐이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속도가 중요하지 않다며 이후에도 여러 번 만나겠다고 여유를 부리는 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분이 중요하다며 초조한 심정을 드러내었다. 뭔가 두 정상 간 조율이 잘 되고 있지 않는 듯했다. 결국 정상회담은 조기에 막을 내렸다.
이어진 양측의 기자회견을 정리하면, 미국 측은 이미 작성된 합의문 초안에 서명하는 대신 더 많은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변 핵시설장 폐기 외의 북한 비밀 생산시설 폐기를 추가로 요구했으며, 이를 북한 측은 수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관측된다. 양측이 이미 마련했던 합의문 초안은 아마도 북한이 영변 핵시설장의 전면적 또는 부분적 폐기를 하는 대가로 미국은 2016년 이후 마련된 5개의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안 중 민생과 관련된 부분을 해제하는 내용을 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왜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을까. 미국의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한 연설 내용에 어느 정도 답이 담겨 있다. 여기서 비건 대표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즉, 이미 김 위원장과 영변 핵시설과 그 이외의(beyond Yongbyon) 핵시설장 폐기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또 비건 대표는 기존에 미국이 북측에 요구하던 사안을 재차 강조했다. 북한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의 포괄적 신고가 필요하며, 전문가의 접근과 모니터링 체제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고, 향후 협상 및 신고에 대한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을 지닌 미국은 이 중 초기 단계라고 생각되는 영변 핵시설장 폐기에 대한 대가로 북측이 요구했던 상당 부분의 제재 완화를 수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비건 대표와 북한의 김혁철 대표 간 작성한 합의문 초안을 사전에 전달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이를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모른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확대회담에 참석했다는 사실과 그 앞 북한 측 자리가 공석이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를 보여준다.
잘못된 합의문 초안에 서명하기보다 이른바 ‘노딜’이 북한 비핵화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김 위원장에게 있어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합의문 초안 수용불가 견해와 추가적 핵 생산시설 폐기 요구는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프로세스가 일부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보도가 나온다. 현재 미국 내부에서는 마이클 코언 전 트럼프 개인변호사의 증언이 진행 중이며, 뮬러 특검의 수사 보고서 역시 조만간 의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아마도 이 같은 국내 정치적 악재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은 만족스럽지 못한 합의문에 쉽게 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국내 악재를 극복할 묘수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현재 미국 내부에서는 노딜이 낫다는 호평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이럴 거였으면 북한과 왜 대화를 시작했느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국내 정치적 변수가 부정적으로 전개될수록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한 대외정책 이슈를 국내 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향후 김 위원장이 그의 신년사에서 언급한 ‘새로운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비핵화의 성과를 낼지도 의문이지만 적어도 북·미 간 협상 프레임을 쉽게 깰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현 북·미 간 프레임을 한동안은 유지하면서 긍정적 결과 도출 가능성을 엿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북·미 간 협상이 결과를 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다.
어떤 방안이 가능할까. 우선 한국 정부의 중재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미 영변 핵시설 외의 시설에 대한 언급이 정상회담에서 나온 만큼 이제 북·미 간 합의 가능성이 높은 실무진의 조율이 있지 않다면 정상회담 재개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향후 북·미 사이에서 보다 전향적이고 현실적인 합의안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