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처음 받아든 35년차 배우 양희경(65)은 “그래, 이게 연극이지”라고 느꼈다고 한다. 지난달 22일부터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 오르고 있는 연극 ‘자기 앞의 생’(연출 박혜선)은 그토록 새롭고, 야무진 먹먹함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울린다.
“3년 전 원작 소설을 읽었는데, 정말 절절하고 슬펐습니다. 모든 인물이 사회적 소수자들이고, 빈자들이죠. 연극은 종교·인종·세대를 초월한 사랑을 모모와 로자 두 인물을 통해서 풀어냅니다. 크고 넓고 깊은 이 작품을 내가 과연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한 달 동안 고민했죠.”
극은 공쿠르상을 두 번 수상한 세계 유일의 작가 로맹 가리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파리의 슬럼가를 배경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는 유대인 아줌마 로자와 부모를 모른 채 그녀와 살아가는 아랍계 소년 모모의 이야기를 다뤘다.
무대 위 로자는 신성해 보인다. 그는 출생 배경이나 종교, 생김새의 구분을 뛰어넘은 사랑을 모모에게 전한다. 최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양희경의 몸짓과 말투에서도 그런 넉넉함이 풍겨왔다.
“로자는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어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를 겪기도 했고요. 하지만 본성에서부터 사랑이 넘치는 인물이에요. 사랑하는 할머니와 손자의 모습처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피보다 진한 정을 나누는 모모와 로자의 일상은 소소해서 사랑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일깨운다. 양희경은 “무대에 오르기 전, 월동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덜어내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간결한 연기일수록 작품의 의미가 깊고 온전히 전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는 연구를 하고 나면 머릿속에 있는 걸 비워내는 작업을 합니다. 연기가 단순해질수록 보는 사람이 단순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잘 덜어낸 나무가 봄이 되면 더 울창해지는 것처럼 말이죠.”
1981년 연극 '자 1122년'으로 데뷔해 무대와 방송을 숱하게 거친 베테랑이지만 이번 연극은 유독 “젖 먹던 힘까지 짜내는 느낌”이라고 한다. 1시간50분을 배우 단둘이 끌어가는 게 큰 힘이 들뿐더러, 뜨거운 조명 아래 두꺼운 솜바지 의상을 입고 연기하려다 보니 체력적 한계에 부딪혔다고. 그는 “언니(가수 양희은)가 연극을 보러 오면 내가 고생하는 모습에 기절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무대가 좋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 느낌이랄까요. 아이들이 옹알이하다가 걸음마를 떼고, 뛰어다니는 걸 보는 기쁨이 있죠. 연극 작품을 올리는 것도 비슷해요. 또 연어가 바다에 살다 산란하러 강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제겐 첫 시작인 연극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양희경은 “군더더기 없고,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소박하지만 누구보다 너른 품을 지닌 로자와 잠시 겹쳐 보였다.
“배우의 삶이란 게 의상, 소품처럼 짐스러운 게 많죠. 홀가분하게 살고 싶어요. 요리가 취미인데,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어 가족들과 나눠 먹는 일상이 진짜 낙 아닐까 싶어요. 이 연극이 위로가 필요한 분들에게 치유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공연은 이달 23일까지.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