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 속설 뒤집혀… “트럼프 외교적 실패”

입력 2019-03-01 04:03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8일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 중앙정원에서 산책하며 대화하고 있다. 두 정상은 2차 정상회담 이틀째 첫 일정으로 통역만 대동한 채 30분 넘게 단독회담을 했다. 두 정상은 이 회담 후 4분간 함께 정원을 걸었다. 김 위원장은 걷는 내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고 웃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AP뉴시스

국가 정상들이 만나는 회담에서 양측이 사전에 합의한 공동선언문 발표를 돌연 취소하고 공식 일정까지 건너뛴 채 빈손으로 헤어지는 일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양국 최고지도자가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일정한 합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은 ‘실패하는 정상회담은 없다’는 외교가의 속설을 단번에 뒤집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당초 미국 백악관 공지대로라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8일 오전 단독·확대회담을 갖고 오찬을 한 뒤 공동선언문에 서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확대회담이 시작된 지 3시간35분 만인 오후 1시20분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정상회담은 대개 의제와 의전이 완벽하게 세팅된 상태에서 진행된다. 회담 날짜와 장소가 확정되면 사실상 합의문 초안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설사 정상회담에서 핵심 쟁점에 완벽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합의문은 내고 성과로 포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직 외교부 당국자는 “북·미 관계와 북핵 협상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발표하기로 한 합의문을 내지 않고 회담장을 떠나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북·미는 지난해부터 실무선에서 풀지 못한 문제를 정상들이 소통으로 해결하며 진전을 이뤘다. 실무협상이 교착되면 서로 특사를 파견하거나 친서를 교환해 신뢰를 재확인하는 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해 왔는데 이번엔 통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날짜와 장소가 최종 확정됐다. 이때부터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지난해 10월)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던 실무 협상이 바쁘게 돌아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박3일 방북해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와 의제 협상을 했고, 하노이에서 만나 추가 협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 쟁점을 정상회담으로 넘겼는데, 정상회담에서도 답을 내지 못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 회담 결렬은 ‘외교적 실패’”라고 평가했다. 준비 부족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조셉 윤 전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CNN 인터뷰에서 “미국은 비건 대북특별대표 수준에서 협상 진전이 있을 때까지 정상회담 개최를 기다렸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상의한 끝에 사인을 보류했다”는 취지의 뒷얘기도 전했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대좌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 회담이 결렬된 이상 양쪽 모두 확실한 성과가 담보돼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재 문제는 실무선에서 풀 수 없는 문제라 당분간 해법을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가디언은 “북한에 비핵화란 일방적인 ‘무장해제’ 약속이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북·미 상호 간 군비 축소와 긴장 완화를 의미하는 모호한 단어”라면서 “향후 비핵화 협상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의도한 협상전략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아이슬란드에서 열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적이 있다. 당시 고르바초프가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중단을 요구하자 회담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레이건은 당시 미국 내에서 날선 비판을 받았지만 소련은 이후 자진해서 협상테이블로 돌아왔다.

하노이=권지혜 기자, 장지영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