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기념관 이름은 히브리어로 ‘야드 바쉠(Yad Vashem)’이다. 야드는 기억이고 바쉠은 이름이라는 뜻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명의 이름을 기록한 곳이다. 이 기념관 출구 앞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로 이끌고, 기억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인간은 남에게 ‘잊히기’는 싫어하면서도 ‘잊기’는 잘하는 존재인 것 같다. 육신이 쇠약해져서 차츰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요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한 개인의 정체성은 무너진다. 우리 몸은 1년마다 뼛속까지 거의 다 새로운 세포로 바뀌지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일한 ‘나’일 수 있는 것은 기억 때문이다. 하나의 집단도 마찬가지다. 크든 작든 한 집단이 ‘공동의 기억’을 잃어버리면 하나의 세계가 붕괴한다. 가정도 사실 기억의 공동체다. 맛있는 것을 함께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준 기억, 그런 기억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긍정적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도 ‘공동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성서는 ‘기억하다’로 시작해 ‘기억하다’로 끝나는 책이다. 성서에는 무려 328번이나 기억과 관련된 말이 나온다. 고통과 불의와 죄악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기억,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기적을 베풀어주신 기억, 성서는 그런 놀랍고 아름다운 ‘공동의 기억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집트에서 400년이나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신 출애굽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24).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긴 광야 길에서 끊임없이 “너희는 이집트에서, 곧 너희가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라”(출애굽기 13:3)고 이야기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며 하신 말씀은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누가복음 22:19)였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함께 달린 한 죄수가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간청한 말도 “주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였다. 이렇게 성서에서 기억과 믿음은 동의어다.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는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이다. 함석헌 선생은 “일본이 힘이 있어 우리의 주권을 뺏고 이름도 뺏고 나라도 뺏었지만 우리의 정신을 빼앗지 못했다”며 “그들은 힘이 있어 우리를 오랫동안 지배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해방이 도적같이 왔다. 그래서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성경말씀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신명기 7:19)고 했다. 한국의 근대사도 한 편의 ‘출애굽’ 드라마다. 힘으로 억누르는 위력의 세상에서 인도와 정의의 새 세계로 나아간 역사다. 백 년 전, 그 만세시위의 현장에서 이 민족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때 하나님이 베푸신 그 표적과 기적과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 기억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우리의 그 ‘공동의 기억’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기억이 힘이다. 기억은 단순히 머릿속을 맴도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힘이다. 인류는 모두 평등하며 우리 민족과 후손들에게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할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남녀노소 구별 없이 옛집에서 뛰쳐나와 전 세계에 선포한 우리의 그 자랑스러운 ‘공동의 기억’이 갈라진 겨레를 하나로 이어주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평화와 번영의 새 세계로 이끌 것이다.
장윤재(이화여대 교수·교목실장)
[바이블시론-장윤재] 공동의 기억
입력 2019-03-01 0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