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경기도 김포로 발령받았고 곧 서울 용산구 한남동 막사에서 복무했다. 당시 군 장성과 외무부 장관 등의 공관이 한남동에 있었다. 나는 외곽 경비 임무를 맡았다. 해병대이지만 특수부대 성격으로 내륙을 경비한 셈이다. 그러다 1969년 베트남으로 향했다. 월남전 참전을 위해서다. 10대 소녀팬들이 날 배웅하기 위해 부산까지 쫓아왔다. 나를 걱정하며 우는 이들이 많았다.
팬들에 둘러싸여 부산에서 출발할 때는 참 화려했다. 하지만 베트남에 도착해서는 일반인보다 더 엄하게 다뤄졌다. 목숨이라는 게 연예인이고 일반인이고 차이가 없지 않은가. 가수로서는 나와 진송남, 박일남이 베트남으로 향했는데 현지에선 뿔뿔이 흩어졌다.
베트남 다낭 옆 호이안이라는 지역으로 향했다.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소총수였다. 그 지역에 해병대 연대는 우리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피 터지게 맞았다. 선임들은 “사회에서 편하게 있다 왔다”며 나를 더 때렸다. 유명 연예인이었으니 곱게 보였을 리 없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온 선임들은 아주 살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보다 친해진 게 이들이다. 얼차려를 주면 받고 청소를 시키면 열심히 청소했다. ‘연예인인데’ 하며 잘난 척하거나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 빠르게 조직에 녹아들었다.
해병대라면 베트남에 1년은 꼭 갔어야 했고 그 이상 머무르게 하지는 않았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너무 힘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난 2년을 머물렀다. 빨리 귀국하고 싶다는 이들과 달리 한국에 와서 초라하게 있기 싫었다. 한창 젊은 혈기여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어찌 보면 대견하다.
베트남에 처음 갔던 1969년에는 나에 대한 기사가 많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2~3년을 활동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군대 생활 적응보다 더 힘들었다. ‘옛날처럼 화려한 명성을 다시 구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밤마다 찾아왔다.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이었다.
베트남에서는 병영캠프와 작전지역 외에는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여자 친구도 사귈 수 없는 베트남에서 지겨운 1년을 더 연장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지금도 감사하다. 만약 그때 한국으로 돌아왔으면 맥이 빠졌을 것이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한국에서 보고만 있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부대장도 흔쾌히 내 파병 연장 신청을 허락했다.
베트남에선 어머니가 담근 파김치가 제일 맛있었다. 한평생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 전우들이 많이 탐을 냈기에 그 파김치를 내 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호이안에는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었기에 군복도 제대로 입고 있을 수 없었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