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자유]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시니… 진리로 자유를 구하다

입력 2019-03-01 19:27 수정 2019-03-01 19:42
픽사베이
독립운동가들의 저항과 투쟁은 어둠 속의 빛이었다. 조국 독립의 기반을 놓은 3·1운동이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3·1운동은 평등운동과 인권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조국의 현실에 눈뜨게 한 운동이었다.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이상규 고신대 명예교수의 논문 ‘삼일운동에서 기독교의 기여에 대한 고찰’에 의하면 여성 피소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471명으로 전체의 65.6%를 차지한다. 이들 여성은 대부분이 기독교 학교 교사나 학생, 전도부인들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여성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교회의 여성교육과 그 결과로 근대적 민주 의식을 배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산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도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불의에 항거한 믿음의 딸들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인 수백 명의 조선 청년과 여학생들은 도쿄의 기독교청년회관(재일본도쿄조선YMCA)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는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김마리아(1892∼1944)선생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비밀리에 가져왔다.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동경조선여자친목회 회장 김마리아는 일본 여자로 변장한 뒤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옷 속에 감추고 비밀리에 입국하여 전국에 3·1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확산시키는 공을 세웠습니다.”(심옥주의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 중에서)

김마리아 선생은 일제 강점기 최대 여성 비밀 항일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부인회는 전국적으로 독립자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로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전인 1919년 11월 조직이 발각돼 전원이 구속됐다. ‘김마리아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로 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생 고통을 당한다. 이후 중국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컬럼비아대와 뉴욕신학교 등에서 공부한 뒤 귀국,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때 그는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해 대대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독립의 잔 다르크’라는 별명도 가졌던 그는 1944년 3월 13일 53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개성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과 만세운동에도 기독 여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전도부인(여성 전도사)으로 개성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어윤희(1880∼1961) 장로는 독립선언서 80매를 신관빈과 함께 3월 3일 개성 거리에서 배부했다. 이를 통해 만세운동이 송도고보와 호수돈여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확산됐다. 학생들과 교회 청년들이 어 장로 뒤를 따르며 만세를 불렀고 이를 들은 개성 시민 1만여명이 즉시 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대규모 항일시위로 발전했다.

이 일로 어 장로는 그해 4월 11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갇혔다. 어 장로가 갇혔을 당시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는 다수의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돼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유관순(1902∼1920) 열사다. 이화학당 학생이던 그는 고향 충남 천안에서 17세에 3·1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됐다. 당시 그 방에는 어 장로와 만세운동을 한 전도부인 신관빈(1885∼미상) 심명철(1896~1983), 주일학교 교사 권애라(1897∼1973) 등이 함께 있었다. 시각장애인 전도부인 심명철은 개성 지역 만세운동을 벌이다 탄압하는 일본 기마병 행렬에 뛰어든 뒤 군중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하다 체포됐다. 체포 당시 그는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도 먼 줄 아는가.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호소로 만세를 부른 것뿐이다”라며 경찰의 포박에 거세게 항의할 정도로 담대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던 수감자들은 모진 고문을 당한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감옥에서도 이들은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 단원이자 전도부인 이신애(1891∼1982)는 유관순 등과 뜻을 합하여 1919년 12월 24일 옥중 만세운동을 펼쳤다.

민족해방을 위한 노력은 신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평양의 안정석 권사는 아이 둘을 홀로 키우는 상황이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해 당시 평양 남산교회 김찬홍 목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집에 있는 등사판으로 3·1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일제에 들키면 잔인무도한 고초를 당했지만, 여성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을 빨래 광주리 등에 숨겨 전달했다.

기독 신앙에 근거한 민족의식 발현

자유와 평화를 온몸으로 표현했던 기독 여성의 저항 움직임은 어디서 시작한 것인가. 기독 여성들을 3·1운동이란 민족적 거사에 참여하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주선애 전 장신대 교수는 “남존여비 사상에 눌려 지냈던 여성들은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진리로 자유를 얻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뜨거운 응답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사슬에서 해방된 기쁨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독립운동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만세운동을 망설일 때 자기희생적인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확고한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여성들은 성경 속 이스라엘의 민족해방에 영감을 얻어 민족독립의 소망을 품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국권 상실의 암담한 상황에도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기독 여성이 상당수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들은 신앙전파와 독립운동에 힘썼을 뿐 아니라 여성 교육과 남녀평등사상 전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 선교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최초의 여성 비밀결사 단체인 송죽결사대를 조직한 김경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이끌며 철저히 신앙 앞에 바로 선 최덕지, 독립단의 본부였던 맹산독립단을 창설해 총과 다이너마이트 등의 무기와 군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신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선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 영화 ‘암살’의 실존 인물 남자현 등 분명하게 존재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러나 2019년 1월 기준,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유공자 1만5180명 중에서 여성은 357명, 2.4%에 불과하다. 그중 훈격이 가장 높은 대한민국장을 받은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한 명이다. 서훈을 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 2000여명을 포함한다면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는 훨씬 더 많지만, 여성의 독립운동에 대한 조명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