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의 A과장은 최근 정책 아이디어를 보고하다가 상급자로부터 당황스러운 말을 들었다. 상급자는 “네가 책임질 수 있느냐”고 했다. 사실상 정책을 입안해서 실행하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라는 말로 들렸다. A과장은 “위에서부터 저렇게 몸을 사리고 들어오면 실무자들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일도 나중에 문제가 될까 싶어 피하게 된다”고 전했다. 또 다른 경제부처 B사무관은 상급자 보고 때 휴대전화로 몰래 녹음을 한다. ‘신재민 사태’ 이후 시작된 습관이라고 한다. 그는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도 모 서기관으로부터 비망록을 만들라는 충고를 들었다지 않느냐. 문제가 불거지면 하급자에게 책임을 미루는 관행이 있는 한 몰래 녹음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직사회가 웅크려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적극 행정’을 강조하지만 경직되기만 한다. 공직사회는 크게 3가지를 계기로 본다.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태 이후 공무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찬 학습효과, 신재민 사태,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의 폭로가 그것이다.
관가에선 상사의 지시를 녹음하거나 업무자료를 남기는 건 다반사다. 다음 정권에서 문제 될 일은 맡기를 꺼리며 서로 미룬다. 보안에 강점을 지닌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을 쓰는 공무원도 늘고 있다. 정부부처의 C국장은 “텔레그램은 전화번호가 저장된 지인이 사용등록을 하면 이를 알 수 있다”면서 “오래전부터 텔레그램을 써왔는데 올해 들어 공무원 지인들 가입이 크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부처의 세종시 이전으로 메신저 등으로 업무협조를 하는 일이 잦은데 소통은커녕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다.
청와대는 이런 모습에 불만이 크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무회의에서 ‘소극 행정’을 질타하며 “장관 책임 아래 적극 행정은 문책하지 않고 장려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소극 행정이나 부작위 행정은 문책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최재형 감사원장도 “감사가 두려워 일하지 않는 공직자가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공무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경제부처 D과장은 “과장 100명에게 물어봐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10명도 안 될 것”이라고 했다. 3년 후 새 정부가 출범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공직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이다.
최근 공정위가 납품업체에 물류비를 떠넘긴 혐의로 한 대형마트에 수천억원대 과징금을 부과하는 제재에 착수한 것도 ‘보신주의’의 한 행태라는 비판이 나온다. 담합 등 중대한 위반이 아닌 관행적 불공정행위를 문제 삼아 한 해 이익의 수십배에 이르는 과징금을 매기는 건 과도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심사보고서는 조사 결과를 심의하기 위한 중간 절차로 전원위원회(1심 재판부 격)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진다”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한 마디보다 시스템 변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업무 투명성을 높이고 책임소재를 분명하게 해야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진단이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상인 교수는 25일 “공직사회의 보신주의를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공무원들의 업무 책임소재와 비밀준수 등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공직사회의 효율성이 증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전슬기 정현수 기자 zhibago@kmib.co.kr
“3년 뒤 적폐 몰릴라”… 웅크리는 공직사회
입력 2019-02-26 04:02 수정 2019-02-26 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