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 때문에 인생 포기 못해’ 마음 먹자 앞길 열려”

입력 2019-02-26 22:26
장애인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세계밀알연합 이재서 총재.

세계밀알연합은 장애인에게 기독교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국제적인 사역 공동체다. 1979년 10월 16일에 창립된 한국밀알선교단과 92년 6월 8일에 설립된 미주밀알선교단, 유럽 등 기타지역에 세워진 밀알 지체들이 1995년 3월 30일 법적으로 통합돼 출범했다. 한국밀알선교단은 시각 장애인 이재서 총재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15세에 실명했다. 지난 12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세계밀알연합 사무실에서 이 총재를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간증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나는 65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쓰며 졸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안 된다며 대신 동네 서당에 보내주셨다. 더 이상 공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그것은 실명(失明)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 후 원인 모를 열병을 앓았다. 눈앞의 사물이 뿌옇게 보이며 두세 달 사이에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서울 무교동 K안과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했다. 두 달 후 드디어 안대를 푸는 날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안대를 풀며 물었다.

“뭐가 보이니?” “아뇨. 안 보이는데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사 선생님은 한숨을 쉬면서 형에게 말했다. “혹시나 기대했는데 결국 안 되는군요. 이 아이는 열병의 후유증으로 시신경이 손상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로 가기도 하는데 이 아이는 시신경에 영향을 줬네요. 현대의학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13시간 동안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집에 갈 때까지 그 긴 시간 형과 나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동네에 들어섰을 때 형은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앞으로 내가 책임질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책임질게.”

형은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 말에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눈이 안 보이는 데 무슨 책임을 지겠단 말인가. 형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는 동안 나는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삶의 의미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가족에게 짐이 되지 말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반복적으로 죽을 궁리만 하니 서서히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눈물은 그나마 고통이 가벼울 때 나온다는 것을. 눈물은 그래도 희망이 있을 때 나오는 사치품이란 것을.

죽으려고 마음을 먹으니 자연스레 뒤뜰에 있는 감나무가 생각났다. 돌담에 기대 있는 감나무는 평소 내 놀이터였다. 감도 따고 새도 잡았던 그 감나무에 목을 매 죽기로 결심했다. 일기장과 평소 소중히 간직했던 물건들을 아궁이에 넣고 불태웠다. 얼마 후 감나무에 끈을 묶고 목을 매려고 시도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지만 죽기도 힘들었다.

결국 포기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울음이 복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왜 내가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가. 죽음이 유보된 대신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실명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 실명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맹학교 생활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고 친구들과 곧잘 어울렸다. 점자로 읽는 독서는 느렸지만 점자책을 밤새도록 읽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카네기가 쓴 ‘인생의 길은 열리다’라는 책을 점자로 읽었는데 많은 감명을 받았다.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시각장애 외에 다른 장애를 가진 것도 아니고 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들도 많은데, 나는 그래도 15년 동안이나 보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좋은 것들이 내겐 많았다. 절망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결국 총신대에 입학했다.

총신대 3학년 때 밀알선교단을 창설하고 5년간 리더로 일하면서 마음속에 두 가지 갈등이 계속됐다. 하나는 장애인을 위한 선교 사역은 성경 지식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세계 장애인을 위한 선교 기구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궁리 끝에 84년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86년 5월 PCB를 졸업했다. 이어 템플대 사회복지대학원, 92년 6월 럿거스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회복지정책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유학 기간 미국 등 여러곳에 밀알 지부를 세우고 10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모교인 총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됐다. 또 한국을 비롯한 미국 유럽 등 세계의 모든 지부들을 사단법인 ‘세계밀알연합’이란 이름으로 통합해 현재 총재를 맡고 있다. 감사의 찬송이 절로 나왔다. “하나님, 제게 이런 날을 주시다니요? 제가 이것을 다 가져도 되는 겁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세계밀알연합은 전도(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한다) 봉사(장애인을 돕는다) 계몽(사회나 교회가 장애인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도록 계몽한다)을 3대 기본목표로 삼고 있다. 장애인에게 기독교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고 그들의 복지와 재활 및 권익 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79년에 개시된 밀알운동을 이끌고 총괄하는 세계본부이다. 현재 산하에는 한국을 포함한 21개국 120여 곳의 지단, 지소 및 시설이 있다.

정리=임용환 드림업 기자 yhlim@dreamup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