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권총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충격적이어야 할 이 설치물에 초등학생들이 반색하는 것은 총이 분홍색인 데다 과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작가 F X 하르소노가 1977년에 만든 이 설치 작품은 제목도 심상치 않다.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인도네시아의 정치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은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최근 방한해 이렇게 설명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국민이 압박받던 시기였습니다.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어 이런 작업을 했어요. 권총 안에는 옥수수 두 알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총을 흔들면 소리가 나 재밌게 놀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작품 제목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서 뭔가 느끼는 게 있는 거지요.”
아시아 각국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다른 듯하지만 큰 줄기는 비슷한 격동의 현대사를 겪었다. 탈식민과 민족주의의 대두, 베트남전쟁, 이념의 대립, 독재와 민주화운동, 산업화 및 도시화는 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으로 통과했던 정치·사회적 교집합이었다. 그런 아시아의 현대사를 미술을 통해 들여다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선보이는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1990s’전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등 아시아 3개국 국립미술관이 함께 진행한 국제기획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2007년 아시아 큐비즘, 2010년 아시아 리얼리즘에 이은 세 번째 합작품이다. 공동 큐레이터들이 4년 동안 아시아 17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작가 발굴에 나섰다. 참여국과 참여 작가 수가 엄청나다.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 등 13개국 주요 작가 100명의 작품 170여점이 선보인다. 한국 관람객은 서구 미술에 중독돼 있고, 또 아시아 미술이라고 해도 중국 일본 미술 정도만 접해온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 캄보디아 미얀마 등 아시아의 변방으로 일컬어지는 나라들의 미술을 푸짐하게 접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그들의 정치·사회 상황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았고, 그에 대한 각국 예술가들의 반응 역시 흡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에 묘한 유대감이 생겨난다.
전시장 초입에 나란히 걸린 신학철 작가의 ‘한국 근대사-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89년 작)와 필리핀 작가 레나토 아블란의 ‘민족의 드라마’가 그런 예이다.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하에서 살았던 두 나라 작가가 비장한 색조에 담아낸 인간 군상을 통해 시대에 항거한 표현방식이 너무 흡사해 깜짝 놀랄 정도다.
예술가들은 권위와 관습에 저항하고,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존 미술에 도전하는 실험적인 미술 사조를 이끌었다. 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서구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예술을 위한 예술’, 즉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예술을 파악하는 급진적인 미술 운동을 출현시켰다. 다만 그 시기는 차이가 있는데, 한국과 일본 대만에서는 60~70년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등은 70~80년대, 중국은 80~90년대이다.
전시장에는 전반적으로 체제 반항적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고발의 기운이 거칠게 감돈다. 싱가포르 탕다우 작가의 79년 설치작품 ‘도랑과 커튼’은 자신이 살던 동네가 재개발로 철거되자 그 땅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물감을 칠한 천 조각을 흙에 묻은 뒤 날씨와 지형이 이를 완성토록 한 당시의 작품을 재현해 빨래처럼 전시장에 내걸었다. 이는 김구림 작가가 70년 잔디를 불태워 만들어낸 검은 흔적에서 다시 풀이 돋아나 땅이 변해가는 과정 자체를 작품화한 ‘대지 미술’과 오버랩된다. 각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기성 미술에 반항하듯 회화와 조각 같은 전통적 매체 대신에 신체나 일상의 재료를 사용하는 실험적인 미술 작업을 했다.
전시 구성은 세 가지로 분류됐다. 새로운 매체적 경향을 다룬 ‘구조를 의심하다’, 근대화와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문제를 다룬 ‘예술가와 도시’, 사회 변혁 도구로써 미술의 역할을 돌아보는 ‘새로운 연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각각 매체, 내용, 역할로 나눈 분류가 일관적이지 않다 보니 산만함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 작가 왕진은 얼음으로 만리장성을 쌓아 부수는 퍼포먼스를 통해 소비 지상주의를 비판했다. 이는 ‘예술가와 도시’에 포함됐지만 ‘구조를 의심하다’에 들어가도 무방한 작품이다. 차라리 아시아 국가들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내세워 매체 특성과 상관없이 보여줬더라면 더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재료는 신선하고 풍부한데 요리의 깊은 맛을 내지 못했다고나 할까. 지난해 말 일본에서 선보인 데 이어 한국 전시가 끝나면 싱가포르국립미술관에서 순회 전시가 예정돼 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탈식민·독재·자본주의… 미술로 승화시킨 아시아 현대사
입력 2019-02-25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