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뿌리는 ‘변종 엽관제’ 낙하산 코드 인사

입력 2019-02-22 04:00

역대 정권마다 발생했던 전 정권 사람 찍어내기, 이른바 ‘블랙리스트’ 논란이 문재인정부에서도 불거지고 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에서 시작된 사퇴 종용 의혹은 법무부와 국가보훈처 등 타 부처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5년마다 되풀이되는 블랙리스트 논란은 엽관제(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람·정당이 관직을 지배하는 제도)가 없는데도 정권마다 사실상의 엽관제를 시행해 왔기 때문이다. 개국공신들에게 ‘돈이 되는’ 자리를 안겨주기 위해 전임 정부가 임명한 공공기관장 및 공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촌극이 반복되고 있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엽관제는 쉽게 말해 선거에서 이긴 쪽의 국정운영에 맞춰 정부 요직을 물갈이하는 제도다. 미국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 3000개 이상의 자리가 물갈이된다. 우리나라는 직업공무원제를 시행하면서 공공기관장의 임기도 정해져 있다보니 이른바 정치적 재신임을 명분으로 공공기관장에게 사퇴 압박이 가해지는 것이다.

김대중정부는 공정한 공기업 CEO 임명을 위해 사장후보추천위원회 제도를 도입했지만 권해옥 주택공사 사장, 유승규 대한석탄공사 사장 등 정치인의 낙하산 행렬이 이어졌다. 2001년 이에 대한 비판 보도가 이어지자 청와대 공보실은 이전 정권에 비해 낙하산 비율이 줄었다고 강조했다.

이런 모습은 18년 만에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서 고스란히 재현됐다. 지난 20일 청와대는 환경부 문건이 블랙리스트가 아닌 ‘적법한 체크리스트’라면서 “이명박·박근혜정부 블랙리스트 관리 규모는 2만1362명이었지만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 사퇴 동향 문건상의 임기만료 전 퇴직자는 5명에 불과하다. 숫자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사퇴 압박이 있었더라도 이전 정부에 비해 정도가 덜하다는 항변이다.

노무현정부는 2004년 정찬용 대통령 인사수석비서관이 낙하산 인사 근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정순균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에 임명하는 등 인수위 출신 5명을 공공기관장으로 앉혀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정부는 아예 공공기관장으로부터 일괄 사표를 받았다. 일괄 평가 후 재신임을 묻겠다는 의미였지만 사실상 낙하산 인사가 대거 이뤄졌다.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장을 시작으로 금융 공기업과 국무총리실 산하 국책연구기관장에게도 사표를 종용했다. 인사 내용에 있어서도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 라인이 대두됐다.

고소영 인사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박근혜정부는 ‘서수남’(서울대·교수·영남 출신) 인사로 비판받았다. 박근혜정부 임기 첫해 공공기관장만 125명이 교체됐고, 그 가운데 78명이 서수남 라인이었다.

역대 정권은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함께하는 인사들이 각 부처와 공공기관에 있어야 업무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돈이 되는’ 자리마다 낙하산 인사가 어김없이 내려왔다는 게 문제다. 특히 박근혜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직권남용에 대한 엄단으로 사회적 기준이 새롭게 요구되는 만큼 정치권이 국민적 동의를 받아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령 남은 임기가 짧거나 정치인 출신인 경우 퇴출을 적극 유도하고, 전문 경력이 인정될 경우 유임케 하는 식이다.

강준구 박세환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