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육체노동 65세 연장’ 결정한 8가지 이유

입력 2019-02-21 19:39 수정 2019-02-22 00:06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노동가동연한에 대한 상고심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왼쪽부터 조희대 대법관, 김 대법원장, 권순일 대법관. 뉴시스
사진=게티이미지
30년간 달라진 사회환경에 따라 가동연한(노동에 종사해 수익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령의 상한)도 바뀌어야 한다는 게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이다. 가동연한 만 60세를 정립한 1989년에 비해 사회·경제적 구조가 크게 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번에 연장된 건 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이지만 다른 직업군의 가동연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가동연한은 육체노동이 가능한 마지막 나이를 의미한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배상액을 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다. 사고로 장애를 얻거나 사망하지 않았다면 벌었을 수입(일실수입)을 계산할 때 쓰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법원은 1989년 12월 확립한 판례에 따라 가동연한을 60세로 규정해 왔다. 예를 들어 35세에 사고로 장애를 얻은 경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60세까지 25년간 벌었을 수입을 손해배상액에 포함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8가지 근거를 들어 가동연한 60세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평균 수명이 30년 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점을 꼽았다. 1989년 남자 67.0세, 여자 75.3세에 그쳤던 평균 수명은 2017년 남성 79.7세, 여성 85.7세로 길어졌다. 또 당시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4배 이상 커진 점도 언급했다. 1989년 6516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는 지난해 기준 3만 달러로 증가했다.

이어 육체적 업무를 주로 하는 철도원·토목원·건축원 등 기능직 공무원들의 법정 정년이 1989년 만 58세였다가 2013년 만 60세로 연장된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가 점차 연장돼 2033년부터는 65세로 상향 조정된 사실도 덧붙였다.

대법원은 실질 은퇴 연령이 남녀 모두 70대에 달한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와 함께 60~64세의 경제활동참가율이 60%를 넘는다는 통계청 자료를 제시했다. 기초연금법 등 각종 사회보장법이 규정하고 있는 ‘고령자’ 또는 ‘노인’이 65세 이상인 것도 고려 대상이 됐다. 이 같은 변화들을 봤을 때 60세까지만 육체노동이 가능하다는 법원의 태도는 경험칙에 반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가동연한은 65세까지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가동연한을 연장해야 한다는데 사실상 대법관 전원의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구체적인 나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부 엇갈렸다. 조희대·이동원 대법관은 63세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60~64세의 경제활동참가율이 60%인 점, 현재 국민연금 수급 연령은 62세인 점 등 여러 제반사정에 비춰봤을 때 63세가 적정하다는 것이다. 김재형 대법관은 “가동연한을 일률적으로 특정 연령으로 단정해 선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60세 이상이라고 포괄적으로 선언해야 하는데 그쳐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나머지 대법관 9인은 가동연한을 65세로 늘려야 한다는 다수 의견을 냈다.

대법원 판결로 판단이 엇갈리고 있는 하급심들도 교통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하급심에서 진행 중인 소송에서 가동연한을 두고 1·2심이 판단을 달리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어 왔다.

지난해 5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7부(부장판사 김은성)는 한 교통사고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가동연한을 60세로 본 1심을 깨고 65세로 봐야 한다는 판단을 내놨다. 이날 대법원의 판단은 이 재판부의 판단과 상당 부분 궤를 같이하고 있다.

당시 재판부는 평균 수명 연장, 공무원 및 민간기업의 정년 연장, 기초연금 수급 시기(65세), 경제규모의 변화, 실질 평균 은퇴 연령 등을 반영해 가동연한을 65세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미국과 일본의 가동연한이 각각 65세, 67세인 것에 비춰 가동연한 60세는 타당하지 않다고 봤다.

이 재판부는 “가동연한 60세를 유지한다면 60세 이상의 경비원이나 공사장 인부를 쉽게 볼 수 있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2017년 12월 수원지법 민사항소5부(부장판사 이종광)도 원심 판단을 뒤집고 가동연한을 65세로 확대해 인정했다.

이번 판결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도시·농촌일용노동자 등의 민사소송뿐 아니라 다른 직업군의 가동연한에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의 판단이 국민 평균여명과 경제규모 등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기존 판례에서 변호사와 목사의 가동연한을 만 70세로 보고 있다. 의사와 약사, 한의사는 만 65세다.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을 지낸 김한규 변호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주요 판단 근거가 사회·경제적 변화에 있다”며 “이러한 변화는 일반 육체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반의 변화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향후 다른 직업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도 “변호사들이 각자 자신이 맡은 손해배상 사건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대리하면서 가동연한 상향 주장을 할 수가 있다”며 “하급심에서 인정되기 시작해 쌓이면 또 새로운 하나의 법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가현 안대용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