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온유한 사람

입력 2019-02-25 00:02 수정 2019-02-25 17:5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오늘 본문은 이처럼 사랑의 힘과 온유함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온유’의 뜻이 무엇일까요.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라우스’(형용사)와 ‘프라우테스’(명사)가 있습니다. 의외로 이 말의 기원은 야생동물의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 서부의 농장주들은 말을 듣지 않는 사나운 야생마를 길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선 초원으로 데리고 가 작은 당나귀와 함께 묶은 뒤 풀어 줍니다. 그러면 야생마는 이리저리 뛰어오르면서 힘없는 당나귀를 끌고 지평선 너머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며칠이 지나면 야생마와 당나귀가 돌아옵니다. 당나귀를 떼어놓기 위해 날뛰던 야생마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 있는 당나귀를 포기하고 결국 지쳐 얌전해집니다.

온유란 결국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하는 걸 의미합니다. 야성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길든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강한 야성이 주인만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뛰라고 박차를 가하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이라도 달려갑니다. 반대로 아무리 더 달리고 싶어도 주인이 고삐를 당겨 서라고 하면 그 자리에 멈춥니다. 온유함은 철저하게 주인을 위한 성품이기 때문에 산들바람처럼 부드럽지만 태풍처럼 거세게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온유라는 말의 느낌은 왠지 부드럽고 연약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용되는 온유는 무기력이나 연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 타협에 능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절대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환자가 약을 먹고 열이 내렸다거나 뜨거운 바람이 불다 갑자기 상쾌한 바람이 불면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강한 것을 부드럽게 하고 거센 것을 잠재우는 상황, 또한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끝까지 이겨낸 사람에게 선사하는 아름다운 표현이 온유였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씨를 뿌리는 농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농부는 옥토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옥토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농부가 퇴비도 줘야 하고 때로는 밭도 갈아줘야 합니다.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악취 나고 쓸모없으며 거친 것들을 오랜 세월 품고 있어야 옥토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도 마찬가지죠. 차별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든 수용하고 품었을 때 온유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함은 저절로 나오는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배우고 훈련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모세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온유한 자가 될 때까지 배우고 훈련하며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2장에 자세한 이유가 기록돼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뒤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던 중 모세의 본처인 ‘십보라’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구스여자를 선택해 아내로 삼았습니다. 구스여인의 문제로 형과 누이가 비방할 때 인간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며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노하지 않고 잠잠히 묵상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은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말하고 듣는 데서부터 온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하게 말합시다. 기도하고 긴 묵상을 한 뒤 말해야 합니다.

사나운 사람을 가까이에 두는 법은 없습니다. 인내하고 기도하며 사람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온유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 온유한 의인이 이 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땅까지 차지합니다.

김에스더 목사(서울 금호연풍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