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 이후 지금까지 이런 정당은 없었다. 보수인가 극우인가. 1987년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보수정당이 요즘처럼 극우파와 친밀했던 적은 또 없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90년에 피해자 보상이 시작되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95년에 가해자를 단죄했던 5·18민주화운동이 2019년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느닷없이 ‘해석의 영역’이 되고 있다. ‘광주 북한군 투입설’이라는 가짜뉴스로 외면 받던 지만원씨는 한국당 전당대회 덕에 버젓한 이론가 대접을 받고 있다.
80년대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 출마했으면 당선이 확실했을 김진태, 김순례 의원과 ‘하나회’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종명 의원은 지씨에게 판을 깔아주고 같은 장단에 춤을 췄다. 당을 구렁텅이로 끌고 갔지만 표계산에선 손해 볼 것 없다는 태도다. 지씨의 요설에 몇몇 의원이 장단을 맞추자 한국당은 우왕좌왕했다. 역풍이 불고서도 당 지도부는 마지못해 시늉하듯 이 의원만 징계했다.
잠잠해질까 했더니 이번엔 한국당 청년최고위원에 출마한 김준교씨가 극우 스피커를 이어받았다. 30대 김씨는 전대 연설에서 대통령을 향해 “문재인은 지금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 “문재인을 민족 반역자로 처단하자”며 극언을 쏟아냈다. 김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엔 “요즘 세상에 극우가 어디 있습니까”라며 “김준교 효과가 본격적으로 반영되는 다음 주 여론조사에서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오른다는 데 500원 건다”고 했다. ‘태극기부대’에 속해 있었다면 이물감이 없었을 테지만, 그 역시도 지금 제1야당 최고위원을 노리고 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절차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조차 점잖아 보일 정도다.
한국의 보수정당들은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회 전반의 민주화 물결을 거스르진 못했다. 진심이었든, 쇼였든 ‘개혁하는 보수’를 보여주려 했다. 극우로 가서는 집권을 할 수도, 정부를 이끌고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있는 박 전 대통령조차 대선 후보 시절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를 사과하고 ‘경제민주화’를 말했다.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 10년 동안에도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선 감히 공개적으로 폄훼하는 발언이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한국당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시절을 거슬러 80년대 전두환 시절로 온 힘을 향해 역주행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을 계승한다는 한국당에서 5·18을 부정하는 발언이 나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당의 극우 경쟁 전당대회가 ‘돌발사건’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극우파가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유럽과 남미에선 경제 격차 심화와 정당정치의 극단적 대결구도 속에 극우·포퓰리즘 세력이 덩치를 키우고 있다. ‘탈진실(post truth)’의 시대, 저마다 믿고 싶은 사실만 믿고, 보고 싶은 뉴스만 보면서 여론도 극단적으로 양분됐다. 한국도 극우 바이러스의 안전지대는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을 취재하는 기자가 한국당에 대해 긴 걱정을 늘어놓은 것은 제1야당이 바로 서야 여당과 정부가 바로 설 수 있어서다. 한 줌의 강경파에 휘둘리며 좌충우돌하는 야당을 여당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집권을 향한 경쟁상대로도 여기지 않는다. 여당이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법부를 때리며 김경수 경남지사 구하기에 나선 것은 5·18 망언이나 하는 제1야당이 있기 때문이다. 여당이 끝없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시리즈에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 수 있는 것도 ‘박근혜 사면’ 정당성이나 토론하고 있는 한국당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당 전대는 이 당이 수권 가능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날지, 아니면 자폐적인 극우정당의 길로 들어설지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를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임성수 정치부 차장 joylss@kmib.co.kr
[세상만사-임성수] 한국당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입력 2019-02-22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