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박영호] 가버나움

입력 2019-02-22 03:59

칸에서 15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다. 그런가 하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사람들도 많다. 일어나게 한 것은 예술적 감흥일 것이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 것은 삶의 무게일 것이다. 이 둘을 하나에 담아낸 영화 ‘가버나움’을 소개하고 싶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 영화 제목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목사가 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극장을 찾았다.

영화는 소년이 법정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소년은 부모를 고소했다. “왜 고소했습니까?” 재판장의 물음에 “나를 낳았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관객들은 아이의 당돌하고 무례함에 당황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이 아이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어촌인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주 무대이다. 베드로, 안드레 등의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며,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이다. 지금은 성지순례의 중요한 코스다. 이곳에 가면 ‘베드로의 집’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기념교회는 4세기 이후에 지어진 기념물이어서 초기 기독교와는 별 상관이 없는 건물들이다. 그러나 이 집은 훨씬 오래전부터 기독교인들의 예배처로 사용됐으며, 베드로가 살던 집이었을 개연성도 있다. 어느 날 가버나움을 방문했을 때, 이 근처 어디쯤에서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메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달아 내렸겠지 하는 상상으로 가슴이 벅찼었다.

그러나 영화의 가버나움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저주받은 도시 가버나움의 이미지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덧씌운다. 주인공 자인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자기가 몇 살인지도 모르는 소년이다. 부모의 돌봄은 전혀 받지 못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최선을 다해서 동생들을 돌본다. 여동생 사하르가 생리를 시작하자, 자인은 위기를 직감한다. 동생의 생리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모는 곧 알아차리고 사하르를 돈 몇 푼에 신부로 팔아넘긴다. 어린 여동생의 강제 결혼에 항의해 집을 나간 자인은 일할 곳을 찾아 전전하다 라힐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녀의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편안한 잠을 잔다. 미혼모 라힐은 아기 요나스를 가방 속에 숨겨서 출근하고, 화장실에 넣어 두고 간간히 젖을 먹이면서 일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숨겨야 하는 난민이기 때문이다.

아기 요나스의 첫 번째 생일날, 라힐은 손님이 먹다가 남기고 간 케이크에 촛불을 붙여 요나스 앞에 내민다. 요나스가 제대로 불지 못하자, 자인이 대신 불면서 활짝 웃는다. 이날은 자인에게도 첫 번째 생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혈연을 넘어서는 가족의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라힐이 불법체류로 경찰에 체포되자 자인은 혼자서 아기 요나스를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된다. 소년이 아이를 품에 안고 베이루트의 복잡한 거리를 걷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위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동을 자아낸다. 영화의 구도를 단순화하면 이렇다. 자인의 부모는 건강한 몸을 가진 어른이면서 자신들이 살기 힘들다고 어린 딸을 팔아넘겨 버렸다. 어린 소년 자인은 스스로도 살기 힘든 처지에 딸도 아니고, 동생도 아닌 요나스의 삶을 떠안는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인이 요나스를 안고 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안고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장면에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가난, 내전의 상처, 아동학대, 여성학대 등 갖가지 난맥상이 얽혀 있는 저주받은 도시 가버나움. 그러나 이곳 어딘가에서도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거창한 이념이나 정책, 사회 프로그램 이전에 내가 만나는 한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는 것, 성경은 그것을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삶이라 말한다. 이러한 삶이 이어질 때 저주의 땅이 아닌 은혜의 땅 가버나움을 우리는 다시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