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배우 정동환과 권성덕이 비언어극의 정수를 뽐내는 무대에 오른다. 연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이 20일부터 서울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극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원작자인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의 작품으로 ‘연극은 대사가 있어야 한다’는 편견을 과감히 깨부순다.
막이 오르면 극장은 임의의 광장으로 변한다. 그곳에 한 노숙자가 있다. 연극은 광장을 지나치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관찰자 격인 노숙자의 시선으로 다뤄낸다. 수많은 이들이 오가며 부딪치는 광장은 우리가 겪어온 질곡의 역사를 은유하는 동시에 현실의 대립과 소외, 고독을 표상하는 공간이 된다.
단순한 비언어극을 넘어 시각, 청각 등 감각을 전방위적으로 동원하는 총체극으로 볼 수 있다. 20여명의 배우들은 260여명의 인물들로 변신을 거듭한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옷과 오브제, 극장을 흐르는 빛·영상·음악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어우러지며 농밀하게 압축된 수백 개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한다.
관객의 시선과 맥을 같이하는 노숙자 역은 정동환이 맡았다. 1969년 데뷔 후 강렬한 에너지로 관객을 사로잡으며 이해랑 연극상(2009) 등을 수상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왕 역할을 도맡아온 그는 이번엔 광장 속 헐벗은 노숙자로 변해 침묵이란 언어를 전한다. 국립극단 단장과 한국연극협회 이사로, ‘베니스의 상인’ 등 명작들로 60년 가까운 세월을 관객과 호흡해온 백전노장 권성덕은 광장 속 군중이 돼 커다란 존재감으로 무대를 채운다.
극단무천 대표로 눈길을 사로잡는 실험적 작품을 선보여 왔던 연출가 김아라가 5년 만에 내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더한다. 전설적인 일본 작가 오타 쇼고의 침묵극 4부작 ‘물의 정거장’ ‘바람의 정거장’ ‘모래의 정거장’ ‘흙의 정거장’을 선보였었다. 세련된 연출 감각과 미학으로 잘 알려진 그는 이번에도 다양한 감각적 장치를 동원해 시공간을 조망하는 듯한 느낌으로 무대를 구성해냈다. 러닝타임 120분, 공연은 24일까지.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대사보다 강한 침묵으로… 관객 감각을 일깨우다
입력 2019-02-20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