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세르비아군의 보스니아인 집단 학살, 르완다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탄압받고 살해당했다. 하지만 학살 주체와 규모를 놓고는 항상 이견이 나온다. 학살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책임을 피하고자 역사를 재해석하고 피해자들은 역사가 부정되면 잔혹한 탄압이 되풀이될까 두려워한다. 이 때문에 역사를 부정하지 못하도록 막는 법이 ‘역사부정 처벌법’이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역사를 부정할 수 없도록 한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모든 역사부정 처벌법이 순탄하게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2011년 아르메니아 학살 부정 처벌법을 제정했다.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1차 세계대전 당시 자국 내 기독교계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인 150만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경우 징역 1년과 벌금 4만5000유로를 부과키로 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학살 부정 처벌법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뒤를 이은 터키를 겨냥했다. 터키는 오스만튀르크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 의도적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동의 강자인 터키 정부의 입장은 국제무대에서 80년 넘게 정설로 통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20여개 국가가 프랑스의 뒤를 이어 아르메니아 학살을 사실로 인정했다.
프랑스가 남의 나라 역사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2011년 대선을 앞두고 있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50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표를 의식해 무리수를 뒀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역사가들의 손에 맡겨야 할 일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프랑스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터키 역사 바로잡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9일 매년 4월 24일을 아르메니아 학살을 기리는 날로 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15일 아르메니아 학살의 날 제정을 주도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정치 초심자’라고 비판하며 결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종족 간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아프리카 르완다도 역사부정 처벌법이 있다. 르완다 의회가 지난해 7월 개정한 관련 법률에 따르면 대량학살을 부정하거나 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행위, 대량학살과 관련된 이념을 퍼뜨리는 행위 등이 엄격히 금지된다.
르완다 내 다수민족인 후투족은 1994년 4월 소수민족인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투치족이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시켰다는 것이 이유였다. 후투족은 증거도 없이 100일 남짓한 기간 투치족 100만명을 살해했다. 학살은 폴 카가메가 이끄는 투치족 반군 애국전선이 후투족 정부군을 몰아낸 후에야 일단락됐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르완다에서 쫓겨난 후투족은 르완다로 복귀할 계획을 세운 뒤 국제사회에 “대량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후투족 지도자들은 농민들이 충동적으로 살해에 가담했을 뿐 후투족 군대의 조직적인 학살은 없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급기야 1996년에는 후투족의 학살 책임을 명기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보고서가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르완다의 역사부정 처벌법은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카가메 현직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비정부기구나 민간기업, 정당 등이 집단학살 부정에 연루될 경우 단체를 해산하거나 추방하는 조치까지 할 수 있다.
발칸반도 서부에 있는 작은 나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에서는 1995년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다.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고 있던 3대 민족 중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유고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면서 친유고 성향의 세르비아계와 내전이 벌어졌다. 우월한 군사력으로 내전을 주도한 세르비아 군대는 보스니아계를 겨냥한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스레브레니차에서는 보스니아인 8000여명이 살해됐다. 이 사건은 유럽판 킬링필드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고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군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최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선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과장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내전 이후에 분리·독립한 세르비아 공화국에 합류하지 않았던 세르비아인들이 다시 한번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이런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세르비아계의 66%가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다는 통계도 나왔다. 최근에는 밀로라드 도딕 세르비아계 대통령과 아나 브르나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총리 등 유력 정치인들도 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보스니아인들은 국제사회에서 보스니아 내전 관련 역사부정 처벌법을 만들며 대항하고 있다. 스위스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등 유럽 9개국에서는 이미 관련 법안이 만들어졌다. 캐나다에서도 지난해부터 관련 법안 입법이 진행되고 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과거사 왜곡, 역사부정처벌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
입력 2019-02-23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