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신뢰 이유 법관의 표현 자유 제한… 변질된 ‘재판독립 원칙’

입력 2019-02-20 04:00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103조).’ 역대 대법원장들이 하나 같이 강조한 재판 독립의 원칙이다. 지난 11일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1년 9월 그 역시 취임사에서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함에 있어 어떠한 형식의 부당한 영향도 받지 않도록 모든 역량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4개월 후인 2013년 1월,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 ‘법관 블랙리스트’로 불리는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취임사와 정반대되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문건은 당초 성추행·음주운전 등 비위를 저지른 법관들을 문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입장과 다른 ‘튀는 판결’을 하거나 자신의 사법행정 방침에 순응하지 않는 법관까지 ‘물의야기 법관’으로 분류해 이 문건에 포함시켰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공소장에 “대법원장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법관은 문제 법관으로 인식되게 해 도태되거나 순응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법관 인사 구조를 만들었다”고 적었다.

법관 독립을 역설하던 양 전 대법원장이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는 모순적 행동을 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그의 2017년 퇴임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국민의 신뢰야말로 사법부의 유일한 존립 기반임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 표현은 2015년 7월 행정처 기획조정실이 판사들의 인터넷 익명카페 ‘이판사판’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대외비 문건(‘익명카페 설득논리 및 대응방안 검토’)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검찰은 이 문건이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로 만들어졌다고 공소장에 적시했다.

이 문건은 “사법부의 존립 근거이자 기반은 국민의 신뢰”라며 “국민의 신뢰를 위한 법관의 책무는 기본적 품위와 공정한 외관”이라고 밝힌다. 이어 “재판업무는 물론 사회적 이슈, 개인생활 등에 대한 법관들의 ‘민낯’이 그대로 국민들에게 드러나는 경우 사법부에 대한 실망과 냉소, 불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판사들이 익명카페에 올린 개인 의견이 유출될 경우 국민 신뢰를 저하시켜 사법부의 존립 기반을 흔들게 된다는 논리다.

문건은 또 “(투표로) 선출되지 않은 법관의 독립성 보장은 고도의 자기 절제 및 공직윤리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언급한다. 문건은 이에 따라 “법관의 표현의 자유는 법관의 책무를 위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국민 신뢰를 이유로 법관의 표현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한 발상이다.

문제는 ‘국민의 신뢰를 받는 법관’의 기준은 당시 양 전 대법원장과 행정처의 주관적 잣대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는 데 있다. 실제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는 자의적 판단에 의한 인사 전횡이 의심되는 대목이 다수 등장한다.

2014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이었던 김모 판사는 사법행정에 대한 개선 의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물의야기 법관에 포함됐다. 마모 판사 역시 2016년 대법원 판결과 달리 유신헌법 긴급조치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물의야기 법관이 됐다. 혼인신고 시 부부 쌍방 출석을 의무화하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 운동을 추진했다거나 대학교 학생회장 경력을 가졌다는 등도 물의야기 법관 분류 사유로 등장했다.

특히 2016년부터는 2013~2015년 20여명 수준이던 물의야기 법관 숫자가 배 가까운 40여명으로 급증했다. 2016년 법관 인사평가의 기준연도가 되는 2015년은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에 모든 역량을 쏟던 시기였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상고법원 도입 등 당시 사법행정 방침을 거스르는 사법부 내부 흐름에 압박 수위를 높여간 정황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경험에 비춰볼 때, 재판 독립은 오히려 사법부 내 민주적 의사소통 절차를 마련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관 독립은 판사들이 권력자나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재판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며 “일선 판사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내부 민주주의의 확립이 필수 전제”라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