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성 직장인 A씨는 2012년 입사 직후부터 상사에게서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 스트레스가 쌓여 3개월 정도 지나서는 몸살과 복통, 두통도 시작됐다. 직장 내 성희롱과 성추행은 1년간 이어졌지만 정작 퇴직을 강요받고 퇴사한 이는 A씨였다.
40대 여성 B씨도 입사 후 1년간 직장 내 성폭력을 당했다. 상사에게 보고하고 조치를 요구했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성희롱·성추행은 끊이지 않았다. B씨의 우울증과 불안증세가 극도로 치닫자 그제야 회사가 나섰다.
A씨와 B씨는 모두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이들처럼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가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제기 자체가 어려운 현실 탓에 피해 규모에 비해 산재 신청 건수 자체는 적지만 직장 내 성폭력 후유증이 엄연한 노동재해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산재 인정 사례를 분석해보면 회사의 부적절한 조치와 2차 가해 등으로 비교적 가벼운 정신질환이 중증으로까지 번진 경우가 많았다. 회사 측의 신속하고 적극적 대응이 미흡한 현실을 보여준다.
14일 근로복지공단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조배숙 민주평화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산재 신청 건수는 32건이며 이 가운데 30건이 산재로 인정받았다. 인정률이 93%를 웃도는 셈이다.
연도별로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1~2건에 불과했지만 이후 2016년 8건, 2017년 11건, 2018년 9월 현재 8건으로 증가 추세다. 재해자 연령별로는 20대와 30대가 각각 11건으로 가장 많았다. 40, 50대는 5건씩이었다. 공공기관(2건)보다 민간기업(30건)에서의 산재 신청 및 인정 사례가 월등히 많았다.
산재를 인정받은 증상을 살펴보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는 회사의 2, 3차 가해가 동반돼 피해 증상이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스트레스의 경우 중증 정도에 따라 ‘심한 스트레스 반응’ ‘급성 스트레스 반응’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구분되는데 경증이나 중증 반응으로 인정받은 산재 건수는 1건씩이었지만 PTSD 산재는 7건에 달했다.
조기 대응이 이뤄지지 않은 사례가 많다는 뜻이다. 2016년에는 직장 내 성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있었다. 이밖에 적응장애 10건, 우울삽화 4건, 우울장애 3건, 불안장애 2건, 주요우울증·언어장애·전환장애 각 1건 등도 산재 피해자의 증상이었다.
최민 직업환경전문의는 “직장 내 성희롱을 당했다고 다 정신질환이 생기지는 않는다”며 “신속히 대처해야 할 회사가 오히려 2차 가해를 해 정신질환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이상윤 직업환경전문의도 “경증이 비교적 적고 중증인 PTSD까지 가는 것도 회사의 초기 대응이 부적절한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남성들의 직장 내 성희롱 산재 인정도 3건 있었다. 20대 남성 C씨의 팀장은 C씨가 입사한 지 1주일 만에 C씨의 민감한 신체부위 등을 강제로 만지거나 유사성행위를 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 C씨가 고소하자 회사는 오히려 고소를 취하하라고 협박하고 해고 통보를 했다. 30대 남성 D씨도 입사 후 상사에게서 주요 신체부위를 만지는 성폭력을 당했고, 이후 계약 해지를 당했다.
30대 여성 E씨는 회사 공동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던 중 화장실 옆칸 아래 틈 사이로 자신을 향한 스마트폰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압수한 휴대전화에는 2년 전부터 화장실에서 찍힌 E씨의 동영상이 10개 이상 확인됐다. E씨는 적응장애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성희롱 피해가 산재로 인정받는 경우는 여전히 실제 피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성희롱 익명신고 시스템에는 지난해 3월 8일부터 지난달 26일까지 10개월 만에 800여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문제제기를 하면 2, 3차 불이익을 감수해야 해 용기 내기가 어렵다”며 “직장 내 성희롱의 정의부터 피해의 정도나 단계, 부정적 효과 등을 구체적으로 연구해 보다 적극적으로 산재 인정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주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장은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직장 내 성폭력 산재를 지원하는 부서나 NGO 단체에 대한 교육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단독] 직장 성폭력, 2차 가해 더해져 산업재해 된다
입력 2019-02-14 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