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곡물협회장과 전남정미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대한식량공사 전남지부장,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목포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될 때 참여해 전남도당 당원이 됐다. 1960년 현역이자 민주당 구파인 정중섭 전 의원을 꺾고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어렸을 때 집에는 조병옥 신익희 장면 선생과 박순천 여사가 종종 찾아왔다. 목포에 오면 하룻밤을 자고 가는 곳이 우리 집이었다. 그분들과 같이 한방에서 잔 기억도 있다. 그때 사진을 찍어놓았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렸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중요한 얘기를 했다는 느낌만 남아있다.
중학생 때다. 집에서 탁구를 하고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상현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당시 30대였던 그분들에게 용돈을 주시곤 했다. 김 전 상임고문은 김 전 대통령이 운영하던 웅변학원에서 일했던 인연으로 동교동계 정치인이 됐고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어른들의 그런 인연을 어깨너머로 보아온 게 지금도 뜻 깊게 느껴진다.
그때의 인연 때문일까.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에 청와대에 행사가 있으면 나를 부르곤 했다. 내 자리는 대통령이 앉는 헤드테이블에서 멀지 않은 테이블이었다. 하루는 대기업 회장들 사이에서 식사하는 내 모습이 머쓱해 보였는지 김 전 대통령이 나를 가리키며 “남진은 남씨가 아니고 김씨”라며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은혜를 받은 분이 남진의 부친”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가 1960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때 김 전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했다. 낙마했지만 이듬해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됐다.
아버지께 나는 50세에 얻은 늦둥이 장남이었다. 그래서일까. 안타깝게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 아버지는 항상 바빴다. 옛 어른들처럼 보수적이고 말수도 적었다. 한번도 내 엉덩이를 두드려주거나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다. ‘부잣집 아들이 오냐오냐 자라면 버릇이 없어진다’는 생각도 하셨던 것 같다. 아들에게 용돈도 주지 않고 늘 엄하셨다.
말썽꾸러기 장남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까. 내가 ‘공부파’였다면 아버지가 기뻐하셨을까. 이제는 알 방법이 없다. 아버지는 1966년 별세하셨다. 내가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대학생 때였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