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노학자는 최근 한반도에 조성되는 평화 분위기를 ‘하나님의 섭리’로 봤다.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 연구실에서 만난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큰 트럼프 대통령과 핵무기 실험으로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에서 한반도 평화라는 말이 흘러나온다”면서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1988년 발표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일생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평화통일 정책선언을 끌어낸 이력은 서 교수를 진보적 학자라는 틀에 가뒀다. 하지만 그의 사상과 삶은 정반대다. 목회자였던 그의 선친은 6·25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평양에서 목회하던 선친 서용문 목사께서 1950년 북한군에 총살당했습니다. ‘반공 목사’라는 게 이유였죠. 저는 복수를 위해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해 북한에 총을 겨눴습니다. 용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전히 ‘무엇이 원수를 갚는 일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어요. 하지만 서로 원수가 됐던 역사를 극복하는 게 원수 갚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일생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순탄치 않았던 인생이 오히려 평화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꺼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새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었죠. 통일도 이와 같습니다. 잔인한 전쟁에 참여해 동족에게 총을 겨눴던 나 같은 세대는 통일 한반도의 주역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평화를 꿈꾸고 평화가 찾아오도록 노력할 뿐이지요. 이제 통일은 젊은이들의 것이고 이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서 교수는 골이 깊어지고 있는 남남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선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진보와 보수,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이념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선 통일에 대한 서로의 이상을 공유해야 합니다. 자주 대화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죠. 적대시하면서 갈등의 골을 좁히는 건 불가능합니다. 보수교회들이 가진 통일신학이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통일을 위해선 우리가 먼저 하나 돼야 합니다.”
그는 “3·1독립선언문에 담긴 자주독립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서 남북 화해와 통일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서 교수는 “아직 진정한 해방과 독립이 찾아오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을 겪었던 세대로서 후대들에 늘 미안하다”며 “3·1운동 100년을 기점으로 이 땅에 하나 되는 놀라운 역사가 찾아오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손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대동강가의 선친 묘소를 찾고 싶다는 희망도 전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23)]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입력 2019-02-12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