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 트럼프’ 상징하는 흰색 정장이 가득했던 미 하원회의장

입력 2019-02-07 04:00
흰색 정장을 입은 미국 민주당 여성 연방의원들이 5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열린 워싱턴 의회 하원회의장에서 하이파이브를 하며 환호하고 있다. 흰색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최초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한 운동가들인 서프러제트(suffragette)를 상징한다.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올해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을 아우르는 가치는 역시 미국 우선주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의 반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멕시코 국경장벽을 세우고 불법 이민을 근절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경제·일자리 성과를 거론할 때는 자화자찬으로 일관했다. 국정연설이 열린 하원회의장은 반(反)트럼프 진영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입은 흰색 정장의 물결로 가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 밤 9시10분(현지시간) ‘위대함을 선택하기(choosing greatness)’라는 주제로 80여분간 국정연설했다. 그는 연설 초반 “우리는 복수와 저항, 보복의 정치를 거부하고 협력과 타협, 공동선의 무한한 가능성을 포용해야 한다”며 “수십년의 정치적 교착을 깨고 모든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최장기 연방정부 셧다운(업무정지) 사태를 겪은 만큼 정치적 화합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 중반부터 특유의 강경 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에 이 회의장에 있는 대다수가 국경장벽을 위해 투표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장벽은 지어지지 않았다”며 “내가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 이민에 대해서는 “의회는 미국이 불법 이민과 무자비한 범죄 카르텔, 마약 밀매, 인신매매를 끝내기 위해 헌신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며 “우리는 국민의 생명과 일자리를 보호하는 이민 시스템을 만들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호무역주의를 한층 강화하겠다는 방침도 분명히 했다. 그는 ‘호혜무역법’ 입법화를 촉구하며 “만약 다른 국가가 미국산 제품에 불공정한 관세를 부과하면 우리도 그들에게 같은 비율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호혜무역법에 대해 “현직 대통령이 특정 수입품에 관세를 올리거나 해당 국가의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낮추는 협상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골자”라고 설명했다.

이번 국정연설에서 단연 눈에 띄었던 건 흰색 정장을 맞춰 입은 여성 연방 의원들이었다. 민주당 여성의원 모임(DWWG)의 대표 브렌다 로렌스 하원의원은 “우리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과 연대한다는 의미로 흰옷을 입었다”며 “여성 문제에 눈을 감고 있는 정부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흰색 정장을 선택했다.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지난해 국정연설에선 미투(MeToo)운동을 지지한다는 뜻에서 검은색 옷을 입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여성의원들 간 해프닝도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여성들이 지난해 새로 창출된 일자리의 58%를 채웠다”고 말하자 흰옷을 입은 여성의원들은 다같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앉지 말라. 다음 말도 좋아할 것”이라며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지 1세기가 지난 지금,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이 의회에서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은 하원회의장에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사들을 초청해 ‘대리 신경전’도 펼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불법 이민자에게 살해된 희생자 가족을 소개한 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1944년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노병 3명과 성이 ‘트럼프’라는 이유로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10대 소년도 초청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이민자 인권 단체를 이끌고 있는 안젤리카 살라스와 마조리 스톤맨 더글라스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의 아버지 등을 초청했다.

하원회의장에선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분열상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기준으로 왼쪽에 앉은 공화당 의원들은 연설 주요 대목마다 기립박수를 치거나 “유에스에이(USA)”라고 외쳤다. 반면 오른쪽에 자리한 민주당 의원들은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은 장병에 대한 존경을 표할 때나 여성 권리 향상과 관련된 내용에만 기립박수를 쳤다.

트럼프 대통령 바로 뒤 의장석에 앉은 펠로시 의장은 연설 대부분을 건조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펠로시 의장은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수사를 “우스꽝스럽고 당파적인 조사”라고 비난하자 살짝 미소지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국정연설이 끝난 뒤엔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주지사에 도전장을 냈던 스테이시 에이브럼스가 반론 연설에 나섰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많은 봉급 생활자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며 “국민의 희망은 민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화당 지도부에 의해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