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년을 기억하시는지. 2005년 방송 프로그램 ‘느낌표-눈을 떠요’(MBC)에 나온 열두 살 소년은 앞 못 보고 듣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과 귀가 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방송을 통해 각막을 이식받아 눈을 떴고, 눈을 뜨자마자 아들에게 “우리도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고 했다. 소년은 이 말을 마음에 새기며 자랐고, 어머니는 그 말을 지금도 실천하며 산다.
아들 원종건(26)씨와 어머니 박진숙(57)씨 모자가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감사와 인내, 나눔의 시간이었다. 한눈에도 ‘훈남’인 원씨는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엄마가 말한 ‘더 좋은 일’이 거창한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길 가다 떨어진 휴지 조각을 줍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따듯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모자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어머니 박씨는 고교 시절 열병을 앓다 청력을 잃었다.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가난 때문에 딸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 아들조차 제대로 키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박씨는 영양 부족과 스트레스로 시력을 점차 잃게 됐다. 원씨가 당시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을 들려줬다.
“엄마가 저랑 노숙을 했던 적이 있어요. 비 오는 날, 저를 안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잠이 들었어요. 잠에서 깬 제가 우유를 마시던 아이를 보면서 ‘나도 우유를 먹고 싶다’고 졸랐던 모양이에요. 엄마는 버려진 우유갑을 주워 깨끗이 씻고 수돗물을 채웠다고 해요. 그러곤 ‘이게 우유야’라며 제 손에 쥐여줬다고 해요.”
모자는 다행히 누군가의 안내로 모자보호소에 갔다. 보호소는 직업교육을 통해 자립을 돕는 기관이다. 최대 거주 기간은 1년. 다른 모자 가정은 일자리를 얻어 하나둘 떠났지만 박씨 모자는 나갈 수 없었다. 청각장애 때문에 일을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박씨는 아들을 입양 보내고 자신은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남편, 딸에 이어 아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박씨는 여행을 떠났다. 돈이 없던 그는 여행지로 기도원을 택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기도원이었다. “엄마가 나를 안고 밤낮으로 기도하며 우셨어요. 처음엔 아들이 어딜 가든 행복하길 바란다고 하다가 나중엔 아들과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어떤 어머니가 자식과 헤어지길 바라겠는가. 그때 한 권사가 울며 기도하는 박씨를 보다 일주일치 식권을 사서 건넸다. 일주일간의 숙식이 해결된 것이다. 원씨는 빙긋 웃으며 이 얘기를 덧붙였다. “엄마가 그때 갈치와 포도가 그렇게 먹고 싶었대요. 그런데 기도원 식당에서 일주일 내내 갈치와 포도가 나왔다네요.”
기도원에서 보호소로 돌아왔을 때 박씨는 기적처럼 취업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됐다. 여성 전용 기숙사가 있는 속옷 공장이었다. “어머니는 기숙사에서 제가 다른 이모들에게 구박받을 때도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하셨어요.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칠까 봐 남들이 다 잠든 새벽에 기숙사 목욕탕에서 저를 씻겨주시곤 했죠.”
박씨는 허리띠를 졸라매 월급을 모았고,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방 두 개짜리 반지하 집을 얻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느낌표’에 출연해 엄마가 시력을 회복했지요. 그 뒤로도 많은 분들이 저희를 도와주셨어요. 제가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도 동네 보습학원 원장님이 무료로 가르쳐주셨고요.”
원씨는 경희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공부하는 동안 친구들과 ‘엄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청각장애인을 비하하는 ‘벙어리장갑’이란 말 대신 ‘엄지장갑’으로 부르자는 캠페인이었다. 현재도 ‘1일 1수어(手語)’ 공유 프로젝트를 한다. 2016년 전자상거래 기업 이베이코리아에 취직한 그는 사회 공헌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일이 재미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원씨는 “전국 소방공무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며 “꼭 필요한 걸 받고 좋아하시는 소방관들의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그는 이제 ‘더 좋은 일’을 하며 어머니까지 부양하게 됐다. 어머니 박씨는 지금도 매일 새벽 기도 후 폐지 줍는 일을 한다. 그리곤 그 돈을 모아 노숙인 등을 돕는 단체에 기부한다.
왜 새벽에 폐지를 주울까. 원씨는 “낮에는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그 일을 하신다. 그분들 일거리를 뺏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라”고 했다. 아들을 통해 어머니에게 수화로 질문했다. 그동안 사는데 가장 큰 힘이 된 건 무엇이냐고. 박씨는 “아들이 옆에 있으니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힘을 냈던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더 좋은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박씨는 “산다는 건 그냥 살아지는 게 아닌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 일부러 나쁜 길로 접어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저 바른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감사하다”고 했다. 모자는 설 연휴 기간 평소 출석하는 서울 충현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원씨는 최근 에세이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북레시피)를 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기적처럼 찾은 새삶… 나눔으로 세상에 보답하렵니다
입력 2019-02-02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