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철도·물류망 16조… ‘MB식 토건 경제’ 회귀?
입력 2019-01-30 04:02
정부는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사업 선정이 과거 정부의 ‘경기부양 토건사업’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지역별로 꼭 필요하지만 예타 통과가 어렵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업만 족집게 선별했다고 한다. 단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뿐만 아니라 연구·개발(R&D) 사업 등을 포함한 것도 부각하고 있다. 이번 예타 면제사업 결정에 굳이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다.
그러나 최소한의 경제성 조사도 거치지 않은 채 대규모 SOC 사업을 벌여 혈세를 낭비할 수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규모가 큰 사업은 영남·충청권에 몰려 있고, 호남·강원권은 소외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발표 시점, 사업 진행시기를 따져보면 지역 여론을 고려한 ‘정치 셈법’이 숨어 있다는 의심도 제기된다.
이번 예타 면제사업은 ‘도로·철도=영남·충청권’ ‘산업단지=호남권’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면제대상에 이름을 올린 23개 사업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광역 교통·물류망 구축사업(10조9000억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역산업을 뒷받침할 도로·철도 확충사업(5조7000억원)은 별개다. 모두 도로·철도·공항 등 교통SOC 사업으로 영남권과 충청권에 집중됐다.
대표적인 게 김천과 거제를 잇는 길이 172㎞의 남부내륙철도(4조7000억원)다. 경남과 경북을 연결하는 동시에 경부고속철도와 연계해 영남권의 수도권 접근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정부는 4시간30분 걸리는 서울~거제 이동시간이 2시간40분 수준으로 단축된다고 본다. 1조5000억원 규모의 충북선(청주~제천, 88㎞) 철도 고속화 사업도 예타 없이 진행된다. 세종~청주 고속도로(8000억원), 제2경춘국도(9000억원), 평택~오송 고속철도 복선 추가건설(3조1000억원)도 면제대상에 들어갔다.
대구산업선 철도(1조1000억원), 석문산단 인입철도(9000억원)는 지역산업 물류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명목으로 예타를 면제받았다. 산업단지 근로자의 출퇴근 시간을 줄이고, 화물운송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한다. 울산 외곽순환도로(1조원), 부산신항~김해 고속도로(8000억원), 서남해안 관광도로(1조원), 영종도~옹진 평화도로(1000억원)도 면제 리스트에 올랐다. 교통SOC 가운데 유일하게 새만금 국제공항(8000억원) 사업이 호남권이다.
정부는 전통적 토건사업인 교통SOC 외에 지역전략산업 투자도 예타 면제의 ‘우산’ 아래 뒀다. 과거 정부의 대규모 예타 면제와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지역전략산업 육성은 주로 호남권에 쏠렸다. 광주광역시에 인공지능 중심 산업융합 집적단지 조성(4000억원), 전북에 미래차 시장 확보를 위한 산업생태계 구축(2000억원) 사업이 예타 없이 추진된다. 전남에는 수산식품수출단지(1000억원)가 만들어진다. 이밖에 전국 14개 시·도에 R&D 사업을 지원(1조9000억원)하고 55개 국가전략산업 지정 지역에 기존 산업 고도화를 지원하는 스마트 특성화 기반을 구축(1조원)하는 사업도 예타를 거치지 않게 됐다. 제주 공공하수처리시설 현대화, 울산 산업재해 전문 공공병원 설립, 대전 도시철도 2호선 건설, 도봉산 포천선 연장, 동해선 단선 전철화, 국도 위험구간 개선사업 등도 예타 면제를 얻었다.
정부는 이번 ‘국토균형발전 프로젝트’의 효과로 불균형 해소, 낙후지역 활력 제고 등을 내세운다. 하지만 직면해야 할 반발과 비판이 만만찮다. 이명박정부의 ‘토건 경제’로 회귀하느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이명박정부는 4대강 사업과 경인운하 등에 ‘예타 프리패스’를 줬었다. 일시적 경기부양 효과는 있지만 길게 봤을 때 혈세 낭비라는 평가를 받는 사업들이다. 참여연대는 29일 “경인운하는 개통된 지 8년이 지난 지금도 물동량이 예상치의 8.7%에 머물고 있다”며 “경제성 없는 토목사업에 투자하면 결국 세금으로 적자를 메우는 일이 반복된다”고 꼬집었다.
또한 문재인정부는 지난해까지 29조5927억원에 달하는 38건의 사업을 예타 없이 추진했다. 올해 예타 면제사업 24조1000억원을 더하면 박근혜정부 4년간 예타 면제사업(23조6169억원)의 배를 넘어선다. 이명박정부(60조3109억원)와 차이도 크지 않다. 애초 불필요한 SOC 사업을 줄이는 지출 구조조정을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강조했던 게 머쓱해지는 대목이다.
혈세 낭비를 최소화하는 장치인 예타가 무력화됐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번에 예타 면제를 받은 23개 사업 중 7개는 이미 예타 과정에서 경제성 미달이라는 성적표를 받았었다. 이에 대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고 인프라가 취약한 비수도권은 예타를 통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며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예타 면제사업 선정이 지역 간 형평에 어긋난다는 반발도 터져 나온다. 사업 규모가 큰 교통SOC가 영남·충청권에 몰린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부는 사업을 중앙정부가 내려보내는 ‘톱-다운 방식’이 아니라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에 신청하는 ‘보텀-업 방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설 연휴, 내년 4월 치러질 총선을 염두에 두는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홍 부총리는 “지난해부터 정책을 검토해 왔고, 시점이 늦어졌을 뿐”이라며 “정치적 의도는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세종=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