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서지현 검사가 자신의 성희롱 피해 사실을 알리며 확산한 한국판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은 사회 기저에 만연했던 성폭력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권력 관계에 의한 성적 폭력의 사회적 감수성도 높였다. 그러나 사회적 파장이 무색하게 법의 심판을 받은 가해자는 많지 않았다. 여전히 높은 처벌 기준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 마련 역시 답보상태다.
국민일보가 지난해 2월부터 이달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미투 사건 117건을 살펴본 결과 현재 가해자가 구속돼 실형을 받은 사례는 6건에 불과했다. 안태근 전 검사장,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만민중앙교회 이재록씨, 조증윤 극단 번작이 대표 등 미투 사건이 확산할 때 등장했던 인물이 대부분이다.
경찰이 지난해 2월부터 현재까지 SNS 등을 통해 폭로된 미투 사건 99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수사를 벌인 결과 가해자가 기소된 것은 절반 정도인 50건(구속 5건, 불구속 45건)에 그쳤다. 경찰청 관계자는 28일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명확한 피해사실을 밝히기 힘든 41건은 정식 수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며 “6건은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통계가 말해주듯 문턱이 높은 법 적용이 여전히 미투 운동을 옥죄는 최대 난관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비동의 간음죄(폭행·협박이 없었어도 의사에 반한 성관계를 강간·강제추행으로 처벌), 위계에 의한 간음죄 등 가해자에게 보다 엄격하게 적용돼야 할 법적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벌이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현재도 재판을 통해 피해자와 팽팽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차기 유력 대선주자로 꼽혔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비서인 김지은씨에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지난해 8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위력은 있었지만 위력의 존재감이나 지위를 남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시인 고은씨는 자신의 성폭력 의혹을 폭로한 시인 최영미 박진성씨와 두 사람의 주장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10억7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현재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스쿨미투를 촉발시킨 서울 노원구 용화여자고등학교에서 파면된 가해 교사는 지난달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미투 운동 열풍이 거셀 무렵 가해자 엄벌과 피해자 보호를 목적으로 발의됐던 법안들은 여전히 처리되지 않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20대 국회가 발의한 미투 관련법 145건 중 현재 35건(24.1%)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됐다. 나머지는 소관 상임위와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는 형법 개정안은 법사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직 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처벌할 법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미투 사건의 피해자 대다수는 권력구조 아래 가해자와 종속적 관계에 있다”며 “때문에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위력에 의해 가해지는 성폭력을 막을 수 있는 명확한 법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성폭력 고발자를 공격하는 수단이 됐던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법안은 다른 범죄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본회의에 오르지 못했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많은 국가에서는 성범죄를 신변안전 및 육체적·성적·정신적 권리에 반하는 범죄로 특정짓지만 우리나라 법에서는 아직도 현저하게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죄로 인정하고 있어 2차 피해의 위험이 크다”고 비판했다. 이어 “성폭력 피해자가 국가와 사회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피해자 옹호 및 조력 시스템’이 견고하게 갖춰져야 한다”고 했다.
최근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의 성폭력 가해 의혹 폭로로 인해 마련된 운동선수 보호법 마련도 과제로 지목됐다. 최근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체육계 성폭력 가해자를 체육 관련 단체에서 영구 제명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장승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전문강사는 “앞으로도 미투 운동이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비난만 일삼는 남녀 간 성 대결 구도를 타파하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아 피해자가 당당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사야 이동환 기자 Isaiah@kmib.co.kr
미투 사건 117건 중 실형 선고 6건 뿐, 여전히 높은 제도의 벽
입력 2019-01-28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