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1운동 100주년의 영광을 ‘기념’하는 한국교회는, 1938년 공식적인 신사참배 결의라는 오욕도 ‘기억’해야 한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신앙인들에게 1938년 비신앙적 신사참배 결의는 이율배반적인 사건이었다.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과거에 일어났거나 경험했던 나쁜 일들은 잊어버리고 좋았던 일들만 선별해 기억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의 오욕은 애써 감추고 3·1운동의 영광은 가능한 한 드러내려 한다면 이는 므두셀라 증후군과 다르지 않다.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의 영광을 경쟁적으로 기념하기에 앞서, 일제 말 한국교회의 변절과 좌절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3·1운동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려 했다면 지난해 신사참배 공식 결의 80주년을 맞았을 때 전 교회적인 참회의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의 영광에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사참배의 변절에 대해 애써 입을 다물고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결코 사회의 동의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 지도자들의 주도적인 역할을 앞다퉈 칭송하고 신사참배와 전쟁 협력을 자행했던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의 과오에 대해선 지나치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이중잣대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들이 과거 영광의 단순한 회상이거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덮는 면죄부로 사용돼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과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위해 100년 전 결연히 일어났던 평범한 남녀노소 기독교인들을 기념하는 동시에 사회적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된 작금의 한국교회 모습에 대한 참회와 새로운 갱신의 다짐이 이뤄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취사선택이 아니라 비교분석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기독교의 공헌은 적극적으로 노출하면서 신사참배와 전쟁협력의 오욕을 숨길 수는 없다. 오히려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교회의 모습과 신사참배라는 형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교회의 모습을 비교하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체성 회복과 갱신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신사참배가 어쩔 수 없는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이뤄진 강요된 행위였다고 하더라도 같은 시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박해와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한, 신사참배는 결코 합리화될 수 없다. 설령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라고 스스로 믿었다 해도 민족과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의 민낯으로 설 수밖에 없다.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는 일제강점기 말인 1943년 만들어졌다.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던 신앙인들은 이 찬송을 부르며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라고 흐느끼며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마저 추방당한 상황에서 홀로 신사참배와 전쟁 협력에 내던져진 한국교회의 애절한 찬송이었다.
역사적 이단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때마다 동시대 교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게 된다. ‘이단 대처’와 ‘교회 갱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건강한 교회가 이단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할 수 있다. 오늘날 심각한 이단 문제는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가 그 원인을 제공해주고 있다. 심지어 이단들은 사회봉사에 집중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사회에 알리고 이단 규정의 주체인 교회를 향해서는 “너나 잘하세요”를 외치고 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들이 일회적인 홍보용 이벤트나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 세탁을 위한 면피용 행사로 비치지 않으려면 한국교회는 ‘1919년’과 ‘1938년’의 순간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
[시온의 소리] 1919년, 그리고 1938년
입력 2019-01-29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