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신을 보전하고자 했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삶이 그러했고, 홍수 이전에도 또 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은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벨탑을 쌓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안정과 평화가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됐습니다. 세상은 점점 강퍅해졌고 불신공동체의 벽은 더욱 높게 쌓였습니다. 성경은 이를 사탄과 죄에 억눌린 삶의 당연한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견고한 불신공동체에서 한 사람을 불러내 그들을 변화시킬 신앙공동체를 일으키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장면입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브라함의 삶의 터전이었던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아카드’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수메르의 종교나 예배행위는 인격적인 신에 대한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것은 자연의 현상을 지배하는 신에게 아첨하거나 감언이설을 하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달랜다는 의미였습니다.
또 다신론 신앙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다신론은 신들 사이에도 위계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엔릴’과 같은 위대한 신은 왕과 귀족에게 존경과 예배의 대상이었고, 일반 평민은 지역의 신이나 가족 신을 섬기는 실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당시로선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을 받아들인 것은 관습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가족 신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브라함에게 전부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완전히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를 불러내신 구원의 사건과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심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한 가지, ‘떠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 2절의 세 가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며,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위대한 순종을 한 결과 이런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공하고 자녀들이 잘되는 복을 누리자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놓치게 됩니다. 본문은 성경 전체를 통해 재해석돼야 합니다. 신약 갈라디아서에서 언급된 바를 참고로 다시 풀어보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세상에서 누리는 형통의 복이 아니라 구원의 복입니다. 구원의 복을 누릴 대상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아들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이며,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이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신의 사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는 사회, 세상의 가치관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불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낸 하나님의 의도는 교회(에클레시아)를 불러낸 신약의 하나님의 의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백성을 일으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계획을 이루려면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속에 싹을 틔우고 줄기가 나게 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해야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강대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불신 공동체’를 변화시키고자 하셨고, 그 원동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신약의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이 세상의 악함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삶의 방식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세상을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김동일 목사(서울 생명찬교회)
[오늘의 설교]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입력 2019-01-29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