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연(가명·80) 할머니는 서울 서초구의 한 무허가 판자촌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그 뒤로는 산이 있다. 앞으로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와 대학 건물이 판자촌을 가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할머니는 27일 이곳에서 샴푸와 참치통조림 등 생필품이 담긴 상자와 이불 한 채를 받았다. 비영리공익재단 아름다운가게가 홀로 설날을 보내야 하는 소외이웃에게 나누는 ‘아름다운나눔보따리’다. 자원봉사자인 걸그룹 카라 출신의 배우 박규리씨가 전달했다.
나 할머니는 “생전 이런 데 와보지 못했을 텐데 미안하다”고 했다. 나 할머니의 방은 10~13㎡(3~4평). 곳곳은 ‘기워져’ 있었다. 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뽁뽁이’라 불리는 단열 에어캡 여러 장이 누런색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유리 대신 두꺼운 종이가 발린 미닫이문은 그마저도 오른쪽 위편에 구멍이 나 비닐로 막아뒀다. 할머니는 화장실이 없어 근처 지하철역까지 나간다고 했다.
숨이 다 죽은 빛바랜 회색 점퍼, 보라색 털모자, 두꺼운 양말. 나 할머니는 집에서도 중무장이었다. 그는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고, “겨울에는 잘 때 마스크를 낀다”고, “전기요금 때문에 난방은 안 한다”고 했다.
나 할머니는 매월 기초생활수급비 25만원을 받는다. 비정기적으로 복지회관 등에 나가 청소를 할 때면 월 28만원 정도를 더 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저 살기 바빠서 얼굴을 잘 못 본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다가오는 설날에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날 나 할머니와 같은 독거노인, 조손가정 등 1000여 가구가 아름다운나눔보따리를 받았다. 권달우(36) 김설민씨 부부는 딸 나온(7)양과 3년째 봉사활동을 했다. 권씨는 “딸이 첫 기억을 너무 좋아해서 매년 오고 있다”며 “설날만 앞두면 ‘할머니집 안 가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나온양은 “할머니가 예쁘다고 요구르트 줬어”라고 거들었다. 박종훈(47) 장현영(49)씨 부부는 쌍둥이 아들 준하·준서(16)군과 4년째 참여했다. 장씨는 “날씨가 엄청 추운 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참 전부터 밖에 나와 기다리고 계시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박씨는 “단순히 생필품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직접 전달해드리는 게 의미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단순히 생필품 드리는 게 아니라 情을 나눠요”
입력 2019-01-27 19:22 수정 2019-01-27 19:56